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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숙영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6월
평점 :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읽으면 사람이 편협해진다. 하지만 읽기 싫은 책을 뭐하러 읽겠는가? 그래서 책 선물은 편협함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내가 받은 책 선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었다. 제목만 봤을 때는 무슨 철학 얘기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는데, 고등학교 겨울 방학 때 우연히 들춰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왜곡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걸 난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놀라움을 계속 간직했더라면 내가 좀 그럴듯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곧 주색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책을 멀리했고, 다시 책을 읽기까지 십이년을 더 허송세월해야 했다. 그래도 서른 즈음에 강준만 교수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내게 큰 행운이며, 내게 찾아온 그 두 번째 기회는 놓치지 않았다.
이 책 역시 평소 좋아하던 분한테 선물받았다. 미국의 패권주의와 남미의 아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책은 실제로는 남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실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법 앞의 불평등이지만, 공식적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다음 구절을 읽으면 그런대로 수긍이 간다.
[우리는 원주민을 멸종하고 노예 매매를 일삼던 자들이 도시 광장에 동상이 되어 우뚝 서 있고, 땅을 빼앗고 국고를 거덜 낸 자들의 이름을 따서 거리 이름을 짓곤 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217-218쪽)]
군사독재를 하면서 숱하게 인권을 유린했던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추앙받고, 심지어 기념관 건립이 논의되는 우리의 현실은 그와 유사한 일을 했던 피토체트가 칠레에서 영웅시되는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우리는 남미를 무시하지만,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나로선 의문이다.
해방 후 60년이 되도록 못한 과거청산을 하려고 하자 한나라당은 결사 반대를 하고, 조선일보는 김희선 의원의 조상이 독립군이 아니라 헌병이었다는 왜곡 기사를 내가면서 딴지를 건다. 평소 민족지를 자처하고 일본이 사과를 안한다고 늘 거품을 물어왔던 그 신문이 왜 친일청산에 반대하는지, 그리고 친일파 청산이 왜 한나라당에 불리한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는데, 거기에 장단을 맞추듯, ‘국민’을 자처하는 분들은 “경제가 어려운데 웬 과거 청산이냐”고 소리를 높인다. 그분들에게 이 책의 한 구절을 들려드리고 싶다.
[과거를 기억함은 과거의 저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고, 현재의 발목을 붙잡자는 것이아니라 현재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다(255쪽)]
참고로 이 책에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한번 거론된다.
[대만에서는 생산되는 쌀의 3분의 1은 먹을 수 없다. 수은, 비소, 카드뮴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강물의 3분의 1 정도만 식수로 쓸 수 있다]
우리는 이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 책의 저자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이 사실이 못내 신기한가보다. 책을 선물해주신 별총총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