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의 여성들
베아트리체 마시니 지음, 옥타비아 모나코 그림,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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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남성 편향적이지 않은 것이 뭐가 있겠냐만, 신화에서 언뜻언뜻 엿보이는 여성 차별은 특히 문제가 많다. 그것이 전 세계 사람들, 특히 가치관이 정립되는 어린이들에게 널리 읽히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화에서 남성들의 복수는 영웅적인 행위로 미화, 찬양되지만, 여성의 복수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근거가 있다해도 악녀의 도발로 매도되기 마련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이하 스트라)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바람을 피우는 남자와 공모해 자신의 남편이자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가멤논을 죽였다. 그가 전쟁에서 데려온 카산드라라는 여인도 함께. 행위 자체로 보아서는 악녀라 부르기에 무리가 없겠지만, 그녀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가멤논은 스트라의 원래 남편을 죽이고 그녀와 결혼했고, 트로이 원정 때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나가지 않자 ‘스트라’의 큰딸을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고 속인 후 신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그것도 부족해 전쟁에서 다른 여자까지 데려왔으니 열이 받을만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스트라’는 악녀로만 존재할 뿐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이란 격언이나 ‘여자가 더 잔인하다’는 말도 안되는 말은 이렇듯 남성의 큰 허물은 외면하고 여성의 작은 허물만을 침소봉대하는 사람들의 편견에서 확대.재생산되었다.


우리가 영웅으로만 알고 있는 테세우스, 그가 크레타 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것은 분명 영웅적 행동이지만,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아니었던들 그 미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테세우스가 분노한 미노스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돕기까지 하는데, 배 위에서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거요”라고 다짐했던 테세우스는 섬에 정박해 그녀를 재운 뒤 잽싸게 도망쳐 버린다. 배은망덕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이 사실은 그의 영웅됨에 한점의 티끌도 남기지 못한다. 황금 양털을 훔치도록 도와준 아내 메데이아를 버리고 젊고 공주인 여자를 선택하려는 이아손, 그는 결국 메데이아로부터 잔인한 복수를 당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메데이아는 악녀가 되었고, 이아손은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여성들>은 이런 여자들을 변명하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토로한다. 메데이아의 목소리를 빌어 저자는 외친다.

“남자가 여자의 마음에 대해 뭘 알고 있을 것 같은가요?”


언제나 궁금했던 점 한가지. 그런데 테세우스는 왜 아리아드네를 버렸을까? 주위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테세우스가 누구야? 영화배우야?” 그래서 그냥 내가 생각해 봤다. 아리아드네의 지혜에 빚을 진 건 맞지만, 막상 결혼해서 살려고 하니 이쁘고 머리까지 좋은 그녀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도망칠 때 한 걸로 보아 바람이라도 피면 작살날 것 같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도망친 건 나빴다. 여인을 이용만 하고 버린다면 그건 진정한 영웅이 아니다. 내 맘대로 테세우스와 이아손을 영웅 자리에서 박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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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8-0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중독이다
제가 1등인가요?;;;

비로그인 2004-08-0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니 마태님 서재 리플 1등도 해보네요 하!하!하!

마태우스 2004-08-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크님/제가 님께 까먹고 말씀 못드린 게 있사옵니다. 일등 놀이도 중독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마태우스 2004-08-0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하하, 님의 유머는 역시 수준급입니다.
시아일합운빈현님/음, 그렇군요. 방대한 신화를 책 하나만 읽고 재단한 제가 나빴죠

깍두기 2004-08-0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박탈된 그 빈자리에 마태우스를 세우노라. 이러고 싶으시죠? 호홋. 난 찬성.
마태님, 제가 마태님의 유명한 어록을 제 페이퍼에 써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평소에 미인에겐 너그러우시더라^^)

꼬마요정 2004-08-1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신화의 영웅들은 모두 아마존의 여전사들과 한차례 이상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둡니다. 즉, 모계사회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고 가부장적 사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거지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가 정절녀로 찬양받는 동시에 바다에서 7년간이나 칼립소와 살았던 오디세우스는 영웅이 되었죠... 헬레네는 트로이 전쟁의 원흉이 되어버리고..사실 트로이 전쟁은 메넬라오스가 느낀 굴욕과 아가멤논의 야심 때문이었는데 말이죠...

털짱 2004-08-1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탁이 그녀들을 버리라 시켰다는 건 욕먹을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사랑 때문에 가족을 버려서 행복한 여성은 유사 이래 없는 것 같군요.. 낙랑공주도 자명고까지 찢었는데 아비의 손에 죽잖아요.. 아무튼 마태우스님은 이래저래 미녀들의 사랑을 받으시겠어요. ^..^

sweetmagic 2004-08-1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신화는 읽으면 읽을 수록 변덕스런 인간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신화는 거듭되고 재 해석 되지요. 트로이에서 신들의 자리를 인간들에게 모조리 내어준 것도
재 해석되고 있는 신화의 한 단면이라고 봅니다. 다만... 우머니스트를 주창하는 남성들 ...또는 이른바 똑똑한 여성들의 사회진출로 자신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다고 속으로 좋아라 하는 남성들에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점점 약해지기 때문에 보다 못한 여성들이 당신들의 짐 마저 함께 지워주려 하는 건 아니냐구요. 점점 약해지는 남성들의 모습에 가슴 아픕니다. 이러다 여성들이 먼저 슉슉 진화해서 아예 자웅동체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하는 농담아닌 농담을 해봅니다.

마태우스 2004-08-1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윗매직님/엊그제 사건 이후 님의 주변에는 광채가 나는 듯합니다. 저, 제가 존경해도 되지요? 그리고...제 짐을 지는 건 모르겠구요, 세상은 남녀가 함께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털짱님/아닙니다. 전 털짱님만 계시면 됩니다.
꼬마요정님/으음, 님은 신화의 대가이신 듯... 역시 알라딘엔 숨은 귀재가 너무 많사옵니다. 방금도 파란여우님 서재에서 신화 퀴즈를 하다가, 고수들을 많이 만났지요.
따우님/님같은 유머의 달인을 제가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앞으로 잘 지내 보도록 합시다.
깍두기님/어머나 용서라뇨. 전 미녀께는 제 모든 어록을 다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