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6월 9일(수)

누구와?: 친구와

마신 양: 술일기에 쓸 정도는 된다.

 

오늘은 간만에 일을 좀 했다. 내가 좋아하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었지만 근로의 기쁨은 언제나 큰 것,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밥맛이 좋기까지 했다. 이 얼마만에 느끼는 희열인가!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간 서재 순위를 보니 내가 무려 31위, 11주 연속 5천원이 위태롭다. 잽싸게 마이리뷰를 하나 쓴 뒤 페이퍼를 하나 쓰려고 머리를 굴렸다. 뭘 쓰지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게도 이럴 때가 있을까, 하고 스스로 놀란다. 생각이 안날 때는 서재 마실이 최고, 여러 군데를 다니다보니 노래방에 대해 써야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했다 (플라시보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 개인적으로 감사드린다).

내게도 신곡에 목을 매던 시절이 있었다. 길보드를 사서 들으며 신곡을 연마하고, 노래방에서 불러보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대개 가사까지 다 외워 버려, TV 화면도 안보고 부르며 가사를 외운다는 사실을 뽐내곤 했다. 그당시 난 한물간 노래만을 부르는 사람을 비웃었고, 그에게 보란듯이 노래방 목록의 맨 뒤페이지에서 노래를 골랐다. 모든 신곡을 다 부를 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신곡 중에서 그저 서너곡만 불러도 주위 사람들의 눈은 충분히 휘둥그레졌다. "너무 젊어보여요!" "멋있어요!" 노래를 부르고 나면 내게 쏟아지는 찬사였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갔다. <화장을 고치고>를 마지막으로, 난 신곡취입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귀찮아서'일 것이다. 테이프를 돈주고 사는 것도, 그걸 레코더에 끼워 플레이를 누르는 것도.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난 내가 비웃던 그런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져 버렸다. 젊은 애들이 부르는 몇만번대 번호의 노래들을 난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저런 노래도 있나?"는 표정으로 그들의 노래를 감상할 뿐.

그렇게 되자, 예전과는 달리 노래방을 가는 게 꺼려진다. 가만히 앉아 쥬스만 마시면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안부르고 있으면 괜히 미안해하며, 내게 한곡 부르라고 권하곤 한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게 난 훨씬 더 좋은데... 지도교수와 함께 있을 때는 흥을 돋우기 위해 내가 어쩔 수 없이 불러야 하는데, 내가 부르는 한물간 노래들은-그나마도 몇번씩 부른 적이 있는-분위기를 다운시키기만 할 뿐이다. 노래라는 게 역사성을 띈 게 아닌지라 지금이라도 테이프를 사면, 그래서 신곡 몇 개만 연습하면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지만, 정말이지 만사가 다 귀찮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노래방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래방에서 가만히 앉아 감상만 할 자유를 얻는 것이다. 말과는 달리 그건 그다지 쉬운 건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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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6-1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들은 얘기. 차인표가 신애라랑 노래방을 갔답니다. 차인표는 신나게 신곡을 뽑는데, 신애라는 옛날 노래만 몇 곡 부르더랍니다. 그 상황에서 차인표가 느낀 것....
'아, 나는 바깥에서 일하고 어울려 놀면서 신곡을 섭렵하는 동안, 아내는 살림하고 아이 키우느라 이젠 이런 것에 관심을 못 두었구나....아내에게 미안해라....'
이런 글이 어디엔가 떴대요. 그 후 네티즌들이 <차인표 짱>을 외쳤고....
전 우리 서방님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듭니다. 부르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트롯을 부르는....마누라는 편한 세월 사는데, 서방님은 집안 경제 챙기고 힘든 직장 생활 하느라 저리 되는구나....싶어서. 흑흑. (진/우맘 짱, 하라고 쓰는 글은 아닙니다.^^;)

starrysky 2004-06-1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래를 못 부르기 때문에 노래방에 가는 것도 싫고, 억지로 끌려갔다 하더라도 나는 좀 가만 내버려두고 자기들끼리 놀아줬으면.. 싶은데 굳이 노래를 시키더군요. 느무 싫어요. -_- 차인표가 그 얘기하는 거 저도 TV에서 봤어요. 멋진 사람인 것 같아요. (잘은 모르지만.. ^^)
그리고 마태우스님 저한테 추천해주신 '목욕탕에서 등 밀어주는' 얘기 쓰시라니까요. 저는 씻기 귀찮아서 목욕탕엘 안 가기 때문에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줄 꺼리가 없답니다. ^^
(한마디 덧붙이자면, 마태우스님 페이퍼에서 '일했다'는 글 처음 읽은 것 같아요.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이파리 2004-06-1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화장을 고치고> 어려운데...^^
님의 노래 한 번 들어보구 싶군요.
전 가수 몇 사람만 팝니다. 그들이 신곡을 내면, 한 두어 달 정도 있다가... 노래방을 가지요.*^0^*

플라시보 2004-06-1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흐흐. 제 노래방 글을 보고 소재를 얻으셨다구요? 님이 제공하신 기생충을 이것으로 보답했다고 믿으면 너무 뻔뻔스러운가요? ^^ 아. 그리고 참고로 저도 이제는 노래방 책을 뒤에서 부터 보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가요가 나오는 프로도 잘 안보고 어디가서 듣지도 않으니 별 수 없더라구요. 님의 심정 십분 이해합니다.

마냐 2004-06-1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방이 어느날부터 고문이 되는 거....나이가 든다는 증거라 하던데...암튼, 세상에 할 일은 많고 읽을 책도 많고, 볼 영화도 쌓이는데..어느 세월에 최신곡까지 섭렵하는지 신기한 사람들도 많더군요.

아영엄마 2004-06-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음치라서 노래방이란 간판 자체가 고문입니다..ㅠㅠ 울 남편은 노래 즐겨 불러서 연애할 때 따라가긴 했어도 노래는 딱 한 번 부르고 그 이후로는 안 부른다고 끝까지 발뺌하기.. 그것도 고역이었죠... 어쨋든 노래방 안 가본지도 정말 오래 됬네요..

로렌초의시종 2004-06-1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방 가서 노래부르는 건 진짜 좋아하는데 요즘은 같이 갈 사람이 없다죠ㅜ ㅜ 사실 저로써는 같이 노래방 갈 사람 정도면 꽤 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아무래도 조금은 망가지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사람을 고르는 탓도 있지만요. 뭐 신곡 연습을 딱히 하는 건 아닙니다만 좋아하는 가수들 것 정도는 항상 들어두죠, 장르가 한정되어 있어서 탈이지만^^;

마태우스 2004-06-1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초의 시종님/나중에 직장 다니면 갈일이 지겹게 많지 않을까요? 그때를 위해 열심히 연습해 두시길...
아영엄마님/호오, 저랑 같은 과군요. 미모는 대개 노래를 잘부른다는데, 님은 의외군요.
마냐님/그러게 말입니다. 읽을 책도 밀렸고, 마실 술도 밀렸는데 신곡까지 커버하긴 제가 무리죠.
플라시보님/감사합니다. 님의 격려는 언제나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파리님/<화장을 고치고>가 뭐가 어렵습니까. 최대한 애절하게 부르면 됩니다. "나같은 여자를 왜 사랑했는지 왜 떠나야 했는지...."
스타리님/
-기념비적인 날 맞습니다^^
-등밀어주는 거 말고 다른 소재를 제공하겠습니다
-노래 부르기 싫은 사람은 안시키면 좋겠어요. 근데 아무도 안부르면 썰렁해지지 않을까요?
진우맘님/차인표는 잘생긴 것이 인간성까지 좋단 말입니까. 볼수록 괜찮은 배우 같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