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폴 오스터의 책은 이번이 다섯 번째인데, 책마다 거의 책속의 소설-이런 걸 액자소설이라고 하던가?-이 나오는 것 같다. 다른 책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번 책에서는 그게 좀 심해, 이야기 속의 작가가 또 책을 쓰고 그래서 어느 게 진짜 이야긴지 마구 헷갈렸다. 물론 이건 내가 진득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기차간에서, 지하철에서, 자려고 길게 몸을 누인 상태 등등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독서 습관 때문에 빚어진 일일 것이다. 장정일은 그런 독서습관이 과히 좋지 않다고 한 바 있지만, 밤에 늘 술을 마시니 짜투리 시간밖에 이용할 수가 없다. 알라딘에서 놀지언정, 근무시간에 소설책을 읽을 수야 없지 않는가. 그렇게 읽었지만 오스터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책 역시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인 주인공은 책 표지를 선정하러 출판사에 갔다가 디자이너였던 그레이스를 만난다. 그때 나온 의견을 "좋은 의견"이라고 했던 주인공은 하지만 며칠 후 그 표지가 좋지 않다고 애기를 하러 그레이스에게 가는데, 그건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표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이고, 순전히 다시 만날 건수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런 걸 '작업 들어간다'고 한다. 운명이란 게 있어 될 사람은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운명이란 건 그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 뿐이고, 그걸 사로잡는 건 순전 그의 몫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도 작업이란 걸 한 적이 여러번 있다.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데 데려갈 여자가 없었던 나는 한 여인을 소개받았는데,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첫눈에 반했다. 파티 전에 또 만날 기회가 없을까 머리를 굴리던 나는 "파티 리허설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그녀를 또한번 만나는 데 성공했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너무 친해져, 말도 놓고-내가 4살 위였지만-밤늦게까지 수다를-수다만!-떨다 들어갔다. 파티 때-파티라고 할 건 없고, 친구 집에서 중국요리를 불러먹는 수준이었지만-그녀와 3번째 만난 나는 일년 뒤 이런 카드를 받았다. "사랑하는 마태우스, 당신으로 인해 일년이 너무 즐거웠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녀 역시 '리허설을 한다'는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작업은 다 어설프고 말이 안되지만, 거기 넘어가준 것은 그녀 역시 작업을 한 것이었을게다.

주인공은 몸파는 여자와 딱 한번 정사를 나누는데, 그 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린다. [나는...너무 창피스러운 짓을 했던 뒤라서...하루 반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나는 도덕적인 확신을 지닌 독선적인 용호자로부터 죄책감에 시달리는 비참한 남편으로 전락해 있었다 (199쪽) 나는 내가 저질렀던 한심한 죄를 잊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써보았지만 내가 벌였던 것으로부터 달아날 길이라고는 없었다(204쪽)]
소설이긴 해도, 우리가 불륜의 왕국 쯤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정서는 대충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매춘의 왕국인 우리나라에서, 유흥가를 갔던 남자들 중 이렇게 죄의식을 갖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오스터의 문체야 원래 탁월하지만, 오스터 전문인 황보석 씨의 번역도 여간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읽은 책에서 번역상의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황씨가 자주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가 너무도 친절하게 답글을 달아주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걸 보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었다. 그 감동을 재현하기 위해 이잡듯이 오자를 찾았지만, 유감스럽게 딴지를 걸만한 대목이 없었다. 딱 하나 있다면 250페이지의 주석에 미국 프로야구 뉴욕 메츠팀의 'Shea stadium'을 '시어 스타디움'이라고 한 것인데, 원래는 '쉐이 스타디움'이 맞지만, 번역가에게 메이져리그 전문가까지 되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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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6-0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의 소설은 달의 궁전만 읽어 보았습니다.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사 두기는 했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구요. 혹 폴 오스터를 많이 읽어 보셨다면 그의 책 중에서 제가 달의 궁전 다음으로 재밌게 읽을만한 책을 하나 추천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호밀밭 2004-06-0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이 소설 벌써 읽으셨네요. 전 <환상의 책>을 사두고 아직 읽지 못했네요. 마태우스님, 책을 참 꼼꼼하게 보시나봐요. 전 가끔 뭐 틀린 게 나와도 그런가 보다 하지요. 물론 번역상의 오류는 못 잡지만요. 그저 오자 정도지요.

그리고 플라시보님,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한번 읽어 보세요, 그의 초기작인데 그 후의 소설들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에요. 3개의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다 비슷한 분위기예요. 미스테리한 느낌이 매력있거든요.

panda78 2004-06-0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리바이어던(거대한 괴물) 추천이요- 달의 궁전 다음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환상의 책도, 신탁의 밤도, 뉴욕 3부작도 달의 궁전만큼 재미있지는 않더군요. 나름대로 다 좋긴 했지만.. ^^

플라시보 2004-06-0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님이 추천하신 뉴욕 3부작과 panda78님이 추천하신 리바이던. 두 개 다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뻑^^ (리바이던은 처음 찾으니 없어서 거대한 괴물로 찾으니 있더이다.)

머털이 2004-06-06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숨에' 책을 읽지 못해서 처음 제목을 봤을 때 속으로 뜨끔 했습니다. 요즘엔 에세이류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하루에 3권을 조금씩 읽어 가고 있는데... 좋지 않은 독서습관일까요? ^^;

진/우맘 2004-06-0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지금 읽고 있는데.^^ 본문보다 주석이 더 흥미진진 하더군요. 주석을 읽느라 페이지를 주욱 넘기고 본문 읽으러 돌아가는 것,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

마태우스 2004-06-07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호호, 님과 제가 같은 책을 읽고 있다니, 반갑습니다. 주석을 그리 달아놓으니 꼭 진짜 같아요.
머털이/저도 자주 그래요. 책읽는데 왕도가 뭐 있겠어요?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읽으면되죠^^
호밀밭님/제 리뷰를 님도 읽으신다니 앞으로 더 잘써야겠다는 생각이....
쥴님/그러니까 제가 '창부'로 썼어야 옳은 표현이라는 거죠?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창부란 말을 잘 안쓰던 말이라서 쓰기가 꺼려지네요? 한번만 봐주세요.
플라시보님/전 환상의 책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어요.

노바리 2004-06-07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번에 읽는 독서'는 직장인에겐 거의 불가능이거나 사치죠. 책 읽지 말란 소리지. 장정일이야 하는 일이 집에서 책읽고 글쓰고 하는 거니까 가능한 거구요. 뭐, 주5일 근무하면서 매일매일 6시면 칼퇴근 해버리면서 생계에 지장 안 받는 '귀족 노동자'들은 또 모르겠지만. (근데 우리나라에 귀족 노동자의 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마태우스 2004-06-0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위대하신 노바리님이다!

노바리 2004-06-0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 밥 많이 먹어서 위가 큽니다. --;; (그 비밀을 여기에서까지... 힝, 마태님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