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부처님 오신날, 엘지랑 삼성의 경기를 보러갔었다. 엘지가 5-4로 이긴 경기였는데, 경기 내용은 재미있었지만 어느 팀도 응원하지 않는 나로서는 매우 초연하게, 한번도 안일어나고 경기를 봤다. 내가 엘지를 응원했다면 정말 재미있었을텐데...
잠실 야구장에는 선수들이 나오는 문이 있는데-당연하지! 문이 없으면 어떻게 나오나?-경기 후에는 선수들을 보려는 팬들이 잔뜩 모여든다. 언젠가 한창 잘나가던 김상호를 거기서 본 적이 있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것이 키는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선글라스를 낀 채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야구를 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란 생각을 그때 했다.
그런데 엊그제 보니 선수들이 다른 문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삼십분이면 샤워까지 끝낼 시간이건만, 이것들이 안나온다. 누구 비슷한 사람만 보면 와 하고 뛰어가고 그랬는데, 진필중이 나왔다. 한창 때에 비해 공의 위력이 많이 떨어져 불쇼를 심심치않게 벌이던 바로 그 진필중, 그날 경기에서는 의외로 깔끔하게 세타자를 범타 처리해 기분이 좋을 법도 하지만, 그는 싸인을 해달라는 팬들의 요청을 물리친 채 승용차에 올랐다. '야, 그놈 참 성질 더럽네' 하고 생각했는데,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엘지의 승리를 날린 게 몇 번인데 싸인도 못해주나?-차 안에 타서 사인을 해준다.
조금 있으니 유택현이 나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주사위를 잘못던져 이상훈을 놓친 두산이 울며 겨자먹기로 1지명에 고른 바로 그 선수다. "자존심이 있지 이게 뭐냐?"고, 두산이 제시한 적은 계약금-3천만원 정도였을거다. 이상훈은 1억8천?-에 불만을 터뜨리던 기억이 난다. 좌완으로 빠른 공을 던지지만 컨트롤이 불안한 유택현은 결국 두산에서 받은 적은 계약금만큼의 활약도 못한 채 엘지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지금도 원포인트 릴리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워낙 나오는 선수가 없다보니 그에게도 팬들이 새까맣게 몰렸는데, 그는 수줍게 웃으면서 싸인을 해줬다. 그때, 어디선가 "박용택이다!"라는 함성이 들렸다. 팬들은 무정하게 유택현을 버리고 박용택에게로 뛰어갔다. 엘지의 신세대 스타 박용택, 2년차-3년차인가?-임에도 벌써 엘지의 중심타선을 꿰차고, 얼굴도 제법 잘생긴 그, 팬들은 비로써 기다린 보람을 찾았다.
한참을 싸인을 하던 박용택은-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다-이제 그만 하자며 탈출을 시도하다 제지당했고, 또다시 "정말 가야한다"고 하다가 또다시 붙잡혔다. 사람들이 싸인을 받아도 안가고 버티는데다, 사람들이 계속 몰리니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언뜻 본 그의 팔뚝은 내 허벅지만했는데, 저런 팔뚝이 있으니 그리도 힘찬 스윙을 하는 것일게다. 아무튼 박용택은 열나게 사인을 해주다 갔는데, 내가 너무나 놀란 것은 진필중이 그때까지도 차 안에 앉아서 싸인을 해주고 있었다는 거다. 처음 기세로 보아서는 성의없이 몇 개만 해주고 갈 것 같았는데. 진필중이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 옆에는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 멋진 여자가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야구를 할 걸, 하는 생각을 또다시 했다. 그나저나 어제 경기에서 진필중은 9회에 동점 홈런을 맞음으로써 엘지가 기아에게 역전패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마무리투수가 언제나 잘할 수는 없고, 팬들도 그건 인정하겠지만, 진필중의 최근 성적은 그런 피치못한 사정을 뛰어넘는 듯하다. 이게 다 두산에서 지나치게 혹사한 때문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훗날 진필중이 감독이 되면, 제발 선수들 좀 혹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나친 혹사로 일찍 옷을 벗은 이상훈도 그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