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님께 허접한 책 한권을 드리고 받은 책이 바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책이다. 책은 다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허접한 책과 에코의 내공이 담긴 양서가 맞바뀐 것은 좀 미안한 일이다.

매스컴에도 꽤 소개가 된 이 책을 내가 사지 않은 이유는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에코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한 탓이었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썼다는 <바우돌리노>도 중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너무도 힘이 들었다. 그러니 "에코가 웃겨봤자 얼마나 웃겨?"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에코도 맘 먹으면 웃겼다.

[...당신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개체 삽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자. 개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적절한 곳에 삽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서...도움말을 작동시키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타난다. <문서에 개체를 삽입하는 기능입니다>]
컴맹이라 이런 경험을 부지기수로 한 나로서는 에코의 풍자에 공감할 수밖에. 표지판에 대한 그의 해학이다.
[아둔한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이런 곳에 세우려 할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든, 여러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분기점 같은 곳...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표지판은 가야할 길이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세워야 한다. 운전자를 반대 방향으로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표지판에 대한 불만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여기까지 읽으면 쉽고 재미있는 책을 써준 에코가 한없이 고맙다.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방대한 지식이 없으면 웃기가 힘든 내용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답을 보자.
이카루스: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고 난 기분입니다.
테세우스: 실날 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살만한 거지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보에티우스가 누군지, 아베로에스는 또 누군지, 벨리니, 다게르가 뭘 했던 사람인지 모르니 이어지는 유머에 웃어줄 수가 없다. 역자가 친절하게 각주를 넣어준 게 고마운 대목이다. 역자의 말이다. [에코는 자기 글이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들을...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 있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주석을 많이 붙인 것은 에코의 뜻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석을 붙이는 것이 개역 증보판의 의미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휴, 다행이다. 주석이 없었던들 이 책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저자의 뜻에 반하건 말건 이해를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에코가 쓴 유명소설의 속편들도 원편을 안읽었으니 모르겠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그지 못한다"를 증명한 것도, '무입력 기계와 무출력 기계'에 대한 설명도 에코의 방대한 지식을 확인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나로서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뿐이다. 내가 무식해서 책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사서삼경에 두루 통달하고 난 훗날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처음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에코는, 역시 에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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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2004-05-2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코 에코는... 절~대 한 번 읽어 이해되는 책을 쓰는 작가가 아니죠. 우헐~
오죽하믄 <장미의 이름>을 쓰고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까지 펴 냈겠습니까? <바우돌리노>를 읽으면... 너무나 여러 것들을 집쩍이고 있는지라... 작가의 배경적 지식이... 놀라울 뿐입니다.
그리하야 저도 역쉬 마태우스님과 같은 수준에서 허덕이고 있음다.

panda78 2004-05-2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모르는 게 나오면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가고, 개체삽입 같은 부분에서 신나게 웃으면서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아는게 훨씬 많아지면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플라시보 2004-05-2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은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선물하는 책 목록에 항상 올라가 있습니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과거에 한번 나왔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폭탄세일을 할때 건졌었던 기억이 납니다. 에코의 소설들은 너무 읽기가 어려워서 중도하차를 여러번 했었는데 저 책만큼은 무지하게 재밌게 봤었습니다.

2004-05-29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5-2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말씀만 하지 마시고 그 목록에 있는 다른 책들, 제게도 선물해 주세요^^
panda78님/그러니까 님도 저처럼 이해 안가면 외워라, 그런 식으로 읽으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이파리님/근데 에코 말이어요, 너무 아는 게 많고 그걸 그대로 드러내니까 좀 얄밉지 않습니까?

마태우스 2004-05-2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내가 왜 이걸 페이퍼에 썼을까? 리뷰로 옮기자니 코멘트가 이미 달렸는걸? 그렇다고 두번 게재하자니 점수 때문이라고 오해를 살까 두렵구나. 오호, 진퇴양난이라!

진/우맘 2004-05-2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진퇴양난이시군요.^^ 혹여 찔려서 리뷰 삭제하실까봐, 제가 리뷰에도 코멘트 달아놨습니다. ㅋㅋ

갈대 2004-05-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에서 계속 축구 이야기를 늘어놓는 택시 기사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오늘 밤은 다시 한 번 할배의 유머에 취해봐야겠습니다^^

작은위로 2004-05-2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코의 책을 읽기가 힘들더라구요. 장미의 이름 한번 읽어보려고 했으나 중도에 때려친...^^;;;;;;
아무튼 이책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나 보군요. ^^

starrysky 2004-05-2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끼시는군요. 저만 에코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줄 알고 얼마나 좌절했다구요. ㅠㅠ 덕분에 큰 힘 얻어갑니다. ^^

이파리 2004-05-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자신이 아는 모든 영역의 것들 다 집쩍거려서 이야기를 맞추어 놓는 에코의 능력이 신기할 뿐입니다.(얄미움이 담긴 말투임.)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저 코멘트 일등 했군요. 저리 많은 글을 적었는데두... 음훼훼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