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5월 11일(화)
누구와?: 미국서 친구가 와서 오랜만에 여섯명이 뭉쳤다.
마신 양: 소주 3/4병, 2차 가서는......왕창.

난 젊은 시절보단 지금이 좋다. 20대 초반의 그때는 낭만과 꿈, 날씬한 몸과 탱탱한 피부를 가진 시절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었으니까. 돈을 아끼려고 계란이 든 200원짜리 특라면 대신 150원짜리 보통 라면을 시켰고, 술안주를 하나 시키려 해도 지갑을 확인해야 했다. 지금은 카드가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어도 한끼 식사가 되건만, 굳이 우아한 곳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는 사치를 누리기도 한다. 이 생활이 이젠 몸에 익어버려, 궁핍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거다.

그렇긴 해도 난 이따금씩 과거가 그립다. 형편없는 속물로 타락해 버린 자신을 돌아볼 때면 더더욱 그때 생각이 난다. 그당시 우린 이렇게 놀았던 것 같다. 분식집에서 대충 밥을 먹고, 생맥주집에 가서 열나게 맥주를 마셨다. 번데기와 서비스로 나오는 팝콘을 먹어가면서. 아니면 신촌의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를 마실 때도 있었다. 아줌마한테 옆 테이블 사람이 남기고 간 안주를 달라고 해가면서. 그땐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았나 모르겠다. 사회에 대해 아는 것도 적었던 그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을까.

술만 마신 게 아니라, 모여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한명이 기타를 치면서. 모 커피의 CF에 사용되는 '사각사각 소곡소곡'을 부르던 기억이 난다. '아, 당신이 없는 이세상은 별과 같은 곳...난 정말 당신모습 사랑해요...빰빠라빠빠'. 남자 애들끼리 무슨 재미로 노래를 불렀는지, 참. 같이 놀러도 갔고, 밤을 새가면서 노름도 했다. 우린, 그렇게 놀았다.

친구 중 유난히 사고를 많이 치는 친구가 있었다. 맥주 500cc에 취한 나머지 세면대에 자빠져 이빨이 부러졌었고, 사귀던 여자에게 차여 몇 달을 눈물로 지새웠다. 방위로 군대에 가서는 100킬로가 넘는 동료와 팔씨름을 하다 팔이 부러졌고, 그 부상이 다 나아갈 무렵 배드민턴을 치다 재골절이 되었다. 팔에다 금속을 박아 '인조인간'이 된 그는 그다음부터 볼링장에 가면 15파운드짜리 공을 레인 중간까지 날리는 괴력을 발휘했었다. 아참, 맨홀에 빠진 적도 한번 있었고, 다른 친구 차를 운전해 보겠다더니 결국 벽에다 들이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 휴대폰 회사에 다니며, 한 아이의 아빠다. 얼마 전 내게 불법 카메라폰을 선물한 친구이기도 하다.

사회에 대해 불만으로 가득한 또다른 친구, 그는 우리 사회를 언제나 염세적으로 바라봤고, 가진 자만 잘되는 세상을 원망했다. 이따금씩 부르는 저음의 팝송은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러던 그는 지금 의사가 되어 인천 어딘가에 개업을 했다. 비관적인 세계관과 죽는 소리는 여전하지만, 그건 우리가 뭘 사달라고 할까봐 그러는 것이리라. 번번히 고시에 떨어져 눈물을 흘리던 친구는 결국 검사가 되었고, 또다른 친구는 지금 사업이 망해 의기소침해 있는 중이다. 우린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뻔질나게 만났던 그때와 달리, 우린 잘해야 한두달에 한번씩 만나곤 한다. 만남의 횟수가 적어졌지만, 대화는 더더욱 줄었다.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을 한잔 한 뒤면 가는 코스가 뻔하다. 장르는 정했는데 어느 가게를 갈 것인가가 문제지, 장르 자체에 이의를 다는 친구는 없다. 한때 난 거기가 싫었다. 돈도 아까웠고, 그렇게 노는 게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런 곳보다는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게 난 더 좋았다. 안간다고 버티다 결국 끌려가서, 말없이 비싼 술만 마시다 뻗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지못해서 가는 건 맞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난 내 파트너로 나온 여자와 수다를 떤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만날 수 없는 젊고 이쁜 여자와 얘기를 하는 건 나쁘지 않다. 우린, 그렇게 타락했다.

그런 곳에 가면 돈이 진짜 많이 든다. 한명이 카드로 긋고, 나중에 얼마씩 분담을 한다. 최근에 한 번 간데다 어제도 갔으니, 친구에게 보낼 돈이 장난이 아니다. 그 돈이면, 안주를 엄청 푸짐하게 차려놓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가 있을 텐데.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식의 술자리엔 이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놈들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지, 경제불황이라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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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대학 시절..신촌, 종로, 대학로를 휩쓸고 다니며....우린 무엇에 그리 분개하고, 좌절하며, 기뻐하고, 즐거움에 몸서리를 쳤을까요?...
한 잔 술에 인생을 논할 수 있었던,,,그 시절~아 저도 그립습니다....이상 타락 천사(?) 냉열사였습니다.

진/우맘 2004-05-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모든 남편들은, 룸싸롱, 혹은 단란주점에 다녀 와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죠..."난 술만 먹었지. 그런데, 00 그 사람은 어찌나 밝히는지..."
뭐, 저는 마태님을 믿습니다만.(그리고 부인도 아닙니다만.^^;;;)

플라시보 2004-05-1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진우맘님 말씀이 맞는것 같아요. 제가 아는 남자들도 하나같이 자기는 가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갔었다. 그리고 자긴 술만 마셨다. 옆에있는 놈들은 지분거렸지만 자긴 신사적이었다 등등등. 뭐 저도 마태우스님을 믿습니다만. 아하하하

panda78 2004-05-1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게 거짓말이었단 말이지요? 허허.. ㅡ..ㅡ##
아, 저도 마태우스님 믿어요.. ㅋㅋ

sweetmagic 2004-05-1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남자들 갈 곳은 많은데, 여자들 갈 데는 많이 없죠 ? 여자들 노는데 가는 사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우울하거나 권태스런 돈 많은 아줌마나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분이미지만 떠오느는건 제 편견일까요? 그리고.. 부어라 마셔라 노닐고 보자 하는 여친 하나가 그러더 군요. 여길가나 저길가나 애들이 돌고 도는 것 같애, 도무지 신선한 얼굴들이 없어....

아영엄마 2004-05-1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남편도 친구를 참 좋아합니다. 가족보다 우선일 때가 많다고 느낄 적이 많아요.
아직 털어놓지 않은 비화인데(^^;) 이년전까지만 해도 매 주말이면 남편의 총각친구들이 찾아와서 게임방에서 게임하느라 밤새고 새벽에 들어와서 낮까지 자고 일어나 밥 먹고... 하느라 애들이랑 주말에 놀러가 본 적이 없습니다.ㅠㅠ 이젠 장가가고, 지방내려가고 해서 그런 일은 없어져 버렸지만.. 남자들도 나이들어 갈수록 친구들과 자주 만날 수 없게되는 것이 안타까울 거예요, 그쵸?

호랑녀 2004-05-1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무슨 접대를 받는 것도 아니고(물론 그게 더 나쁘지만), 친구들끼리 만나서도 그런 곳에 가야 하나요?
(괜히 참견하고 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보다는 그런 곳에 가는 게 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믄서... 지금, 어젯밤에 니 남편 안 들어왔냐? 뭐 이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

마태우스 2004-05-1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다들 저를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호호. 믿음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가겠다는 걸로 들리는군요^^
호랑녀님/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호랑녀 2004-05-14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죄송합니다. 제 글쓰기가 좀 과격했나요? 그렇다고 직접 찾아오실 것까지야...
생각해보니, 다른 분들이 재밌는 답글을 많이 달아서 마태우스님 글엔 답글 잘 안 다는데, 난데없이 나타나서 썰렁~하게 만든 것 같네요. 제가 자주 오다 보니, 저 혼자 친하게 느껴서...
진짜진짜... 죄송합니다.

마태우스 2004-05-1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역시 직접 찾아뵙고 답변 드렸습니다. 읽으시고 저랑 좋은 친구가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구호 한번 외쳐보겠습니다.
저를 그런 말에 삐지는 속좁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호랑녀님은 각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