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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형경이 쓴 <세월>을 읽으면서, 엄청 짜증이 났었다. 한 남자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계속 잘해주는 그녀의 행태를 내가 어찌 곱게 볼 수 있겠는가? 히트작을 연속으로 내면서 중견 소설가로 자리잡긴 했지만, 그 이후 김형경은 내겐 바보같고 못난 작가일 뿐이었다.
<성에>를 읽었다. 그 책을 왜 샀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난 그 책을 읽느라 십일 가까운 나날을 보내야 했는데, 책의 두께가 393페이지로 다른 책보다 두꺼운 탓도 있었지만, 내용 전개가 워낙 느려터져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단순한 사건을 그토록 부풀려 써내려가는 것도 재주이긴 하겠지만, 역시 김형경은 나와 코드가 안맞는 듯하다. 처음 몇장만 보고는 예전에 애인이었던 남녀가 유부남, 유부녀로 다시 만나 불륜을 벌이는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꼭 아니라고 볼 수는 없지만). 책의 핵심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재주는 애시당초 없고, 제목이 <성에>니까 책에 언급된 성 관련 대목들만 인용하는 것으로 리뷰를 떼울까 한다.
눈에 고립된 집에서 시체를 발견한 순간, 세중은 연희(남녀 주인공이다)와 한다. 시체를 본 연희가 패닉 상태에 빠져 있어서다. 남자는 말한다. "미안하다..스트레스가 심할 때 남자들은 가끔 그렇게 하거든" 저자는 덧붙인다. "성은 히스테리의 고비를 넘게 하고..가파른 감정의 고비를 넘어서게 하는 기능이 있다" 흠, 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지기 직전, 방공호에 대피한 사람들끼리 하고 그랬다는데, 그게 그래서였군. 사랑의 완성이라 생각하는 성에는 그런 좋은 기능도 있나보다.
이번엔 세중이 맛이 간다. 심지어 오버이트를 하기까지 한다. 연희는 열심히 등을 때리고 있다. "바로 그순간이었다. 세중은 문득 연희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을...(19세)" 난 오버이트를 하고나서 하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오버이트 직후의 역한 냄새를 사랑으로 견디는 것일까? 나 같으면 이렇게 쓸 거다. "그순간 세중은 갑자기 수돗가로 달려가 입을 헹군다. 그리고는 연희를 으스러지게 끌어당겨.." 보라. 얼마나 깨끗한가? 여기서도 성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세 번째로 사체가 발견된 순간, 세중은 시체 세 개를 한곳에 모은 뒤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그러다 음심이 생긴다. "춤을 추던 세중이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연희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걸음을 내디디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세중이 연희와 한다는 건 똑같지만, 이번엔 좀 과격하게 한다. "그 행위는 그동안 연희가 알고 있던 어떤 행위와도 달랐다" 공포감이 증폭됨에 따라 행위의 농도도 짙어진단 얘기? 하지만 일을 끝낸 후 세중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사랑이 커지는 게 느껴지니?" 음...공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커지면 행위가 과격해지는 모양, 너무 많이 사랑하면 애 잡겄다...
둘은 나중에 시베리아를 같이 가자는 얘기를 한다. 그러다 세중이 갑자기 말한다. "죽인다, 그 말...자극적이야" 내가 보기엔 하나도 자극적이 아니던데, 아무래도 어떻게 또 한번 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한 말일 듯 싶다. 그래서 둘은 또다시 하고-4번째다-그정도 했으면 갈데까지 간 셈이니, 마구 한다. "그때부터 며칠간...굴 같은 눈길 속에서도, 조금 파내려간 땅 속에서도, 따뜻한 부뚜막 위에서도 서로를 안았다...잠이 덜 깬 몽롱한 새벽에도, 밥을 먹다가도, 한밤중에 깨어서도 그 일을 했다" 그래, 만판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연희: 나를 때려줘. 내 몸의 관절들을 마디마디 분해해줘. "퍽!"
세중: 너도...나를 때려줘...
연희: 나를 죽여줘..
그러니까 저자는 남녀가 단시간에 너무 많이 하다보면 새로운 쾌락을 찾기 위해 마조히즘으로 간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가보다. 심지어 목을 졸라달라는 얘기도 한다. 사람들도 참... 그냥 조용히 하지, 뭘 그렇게까지?
과거 회상이 끝나고 나서 다시 만난 둘은 모텔로 간다. 이번엔 새디즘이다.
"연희는 가슴속 맹수가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그의 손과 팔목의 맨살에 이빨을 박고 시다는 충동이..."
물론 충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았다...그의 가슴을 물었고...그의 고환을 움켜쥐었다...(19세)" 그럼...좋을까?
이미 여자 둘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세중은 격렬한 정사가 끝난 뒤 이렇게 연희를 꼬신다. "가끔 이렇게 볼까?" 나쁜 놈, 여자 셋도 모자라서 넷을 만들려는 작태 하곤! 이 책에서 느낀 중대한 결론은 이거였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모든 길은 성으로 통한다!
"수컷만이 여러 암컷과 짝짓기를 하며 암컷은 하나의 수컷으로 만족한다는 고정관념"이 "남성 중심사회가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는 저자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책에서 내가 했던 거의 유일한 동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