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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평점 :
품절
서재를 통해 좋은 분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 좋은 분 중 한분이 내게 책을 한권 보내 주셨다. 조세희가 쓴 사진.산문집인 <침묵의 뿌리>다. 성장 단계에서 꼭 읽었어야 할 <난.쏘.공>을 얼마 전에야 읽고서 뒤늦게 감동했으니, 과작으로 알려진 그가 산문집을 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의 사진.산문집 또한 잔잔한 울림을 내게 선사했고, 인간에 대한 성찰과 부끄러움으로 날 이끌었다.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꽤 오랫동안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줄 한줄이 계속 마음 속에 남아서, 진도가 쉽사리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진 사북 지역의 아이들이 쓴 일기를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오늘도 양말을 신으려고 하는데 구멍이 나 있었다. 내 동생 걸 보니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 나는 슬쩍 양말을 바꾸어 신고 왔다. -5학년 박수용-]
[우리 형이 아파서 어머니가 요구르트도 사주시곤 했다. 형은 안먹고 나를 주었다. 그러면 나는 "형아 먹어" 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5학년 김한식-]
그때보다 훨씬 더 경제가 나아진 지금도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그 중에는 목숨을 끊기도 한다. 발전된 경제의 과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좋은 집에서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라온 나로서는, 위 일기의 주인공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탄핵으로 휴식을 갖는 노대통령이 <칼의 노래> 대신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조세희의 책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는 이유를 헤아리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받은 울림을 글로 표현할 재주가 없어, 인상적이었던 대목을 몇군데 옮겨본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스위스를 좋아한다'고 말한다....그러나 스위스 사람들은 어떤 나라에 특히 스위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나라에는 아직도 고통을 받는 사람이 많구나!'라고 생각한다(26쪽)]
스위스를 낙원으로 생각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나도 고통받는 사람 중 하나일까?
[미국의 대공황 당시....경제학자가 사진가를 동원했다. ...비참한 국민생활을 기록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갔다....사진작가들이 찍은 어려운 국민 생활상은 곧 덜 어려운 국민, 괜찮게 사는 국민, 불황과 상관없이 잘 사는 다른 국민에게 보여졌다...사진작가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행복한 생활상도 함께 찍었다. 그 사진들 가운데서 얼마가 공적인 분노를 야기시켰다. 어떤 상황 아래서는 부유한 사람들의 행복이 떳떳한 것이 못되며, 어떤 행복은 바로 죄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준 셈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아프리카 어떤 나라에 맥큐베인이라는 사진작가가... 고통받는 국민들을 사진 찍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가야 했다]
우리나라는 어느 쪽일까? 강남아파트 재산세를 현실화하자는 정책을 내걸었을 때, 영향력이 큰 어떤 신문은 대뜸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고 항변을 해댔다. 그 신문은 이전 정권 때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안전망을 만들려고 할 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복지라고 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거늘, 복지병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드높기만 하다. 아, 우리나라, 신자유주의의 천국. 책 후반부에 실린 사진들을 보고나니 영 마음이 무겁다.
책을 보내주신 그 어느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