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만나서 아기가 생긴다는 오묘한 진리를 알게 된 초등학교 6학년 이후, 난 여느 남자애들처럼 성에 관심을 가졌다. 중1 때는 '좌지우지'같은 단어만 나와도 흥분을 했으며, '자진해서'란 구절을 읽을 땐 거의 자지러졌다. 그런 유치한 단계를 지나고 나자, 난 뭔가 제대로 된 야한 책을 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과거를 돌이켜볼 때 꼭 읽고 넘어가야 할 책들을 안읽은 걸 무지하게 후회하는 나지만, 야한 책들은 그래도 남들 읽은만큼은 읽었던 것 같다.

우리집에 꽂혀있던 세계명작 중 내가 읽은 것은 딱 두권이다. <여자의 일생>이 그 중 하나인데, 사실 읽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게, 특정 부분만 읽어서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내용이지만, 그정도의 묘사도 나에겐 충격이었다. 내가 읽은 또다른 명작은 북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인데,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거의 쓰러질 뻔했다. 거기 나오는 얘기들 중 상당수가 EDPS, 매우 건전하고 심오한 이야기만 담겨져 있을 명작에 뭐 이런 야한 얘기들이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 책은 내 사춘기에 있어서 가장 빛났는 책으로 기억한다.

한번은 아버지 서재에 들어간 적이 있다(아버님은 워낙 무서워서, 서재에 아무도 못들어가게 하셨다). 책상에 놓인 간이 책꽂이에는 책들이 몇권 꽂혀 있었는데, 그중 한권이 <첫사랑>인가 그렇다. 기회를 봐서 난 서재에 잠입한 뒤 그 책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뭔가 나올 듯한 책이었지만, 그 책에서 야한 장면이라곤 남자가 기절한 척을 했더니 여자가 키스를 해준 게 전부였다. 그러고는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정신 든 거 다 아니까, 그만 엄살부려요" 굉장히 아쉬웠다. 바보같은 남자녀석, 누워만 있다니...

다른 책이 없나 봤더니 놀라운 책이 눈에 띈다. 유명 경제학자인 케네스 갈브레이스가 지은 <불확실성의 시대>. 이게 왜 놀랍냐고? 그 책의 제목은 한자로 써있었는데, <不確實性의 時代>라는 제목 중 내가 판독할 수 있는 한자는 不(불)과 性(성)밖에 없었다. 하핫, '성'이 그걸 뜻하는 건 나도 잘 알았기에, 잽싸게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몇페이지 읽다가 책을 집어던지고 배신감에 몸을 떨었는데, 그땐 참 세상이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고교 때인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원래는 '우편배달부'인데, 그들의 항의로 제목이 바뀌었지 아마-영화에 맞춰서 급조된 번역판을 우연치않게 구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읽었는데, 해적판이라 그런지 묘사가 영 개판이었지만, 그 나이에 그게 어딘가. 한 열 번쯤은 더 읽었을게다. 박종화의 <삼국지>도 비슷한 시기에 읽기 시작했는데, 조조가 추씨부인이랑 하는 장면이 난데없이 나와 횡재한 기분으로 읽었다 (조조의 그 욕정 때문에 가장 용맹한 전위가 죽었지 아마).

그러다 김성종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가란 호칭이 붙는 그지만, 범인이 오리무중인 다른 추리소설과 달리, 그의 책들은 범인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니 범인이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없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내가 그의 소설을 특히 좋아했던 것은 야한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인데, 그 당시 읽었던 <제5의 사나이> 첫장면은 명자라는 유부녀가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거다. 그게 어찌나 야했는지, 분당 심박수가 500 정도로 올라갔을게다. 나중에 읽은 <나는 살고싶다>는 추리물이라기보다는 포르노로, 주인공은 시종일관 한다. 상대여자의 이름도 또렷이 기억난다. 색씨집에서 데려온 여자가 '화자', 과부가 '염복매'. 김성종은 그 책에서 낙지의 흡반 어쩌고 하는 비유로 과부를 묘사했다.

그런던 어느날, 김성종이 일간스포츠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돈이 없으니 매일 사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한번 샀더니 둘이서 하기 직전이다. 다음 장면이 너무 기대되어 밤을 꼴딱 샜는데, 허무하게도 다음날은 이렇게 얘기가 전개된다. 막 하려는데 얘가 울면서 엄마를 찾으니까 남자가 다음에 하자고 하고, 화가 난 엄마가 "요놈새끼!" 하면서 얘를 두들겨 패는 내용.  나도 얘가 얄미워 죽는 줄 알았다.

대학에 간 후에도 야한 걸 볼 수 있는 기회는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내가 포르노를 본 건 대학3학년 나이인 본과 1학년 때, 그때 친구들과 여관에 놀러가 처음으로 봤는데, 여관에서 그런 걸 안틀어줘, 한번도 경험이 없던, 그래서 가장 아쉬웠던 내가 주인에게 여러번 전화를 걸었다. "....좀 틀어주면 안되요?" 몇 번을 이러자 주인은 십오분짜리 포르노를 틀어줬는데, 대개의 포르노가 여성학대를 다루고 있는 반면 그건 그래도 인간적인 영화였다. 내 친구들이 "포르노 보고 돌아버린 애도 있다"느니 하면서 겁을 줬던 기억도 난다. 인간적인 포르노를 처음 봐서인지, 난 시중에 유통되는 그런 포르노를 보지 못한다.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야하기는커녕 기분이 나빠진다. 대학 때 읽은 야한 책은 기억나는 게 없다.

졸업 후, 스포츠신문을 샀더니 마광수가 <알라딘의 램프> 어쩌고 하는 소설을 연재 중이다. 야한 게 심심치 와서 쭉 봤는데, 소설 내용이 겁나게 야한 적이 있었다. 다음날이 무지하게 기대가 됐지만, 그날 저녁 마광수의 구속 사실이 뉴스에 나왔고, 다음날 내용은 아주 건전하게 바뀌어 버렸다 (하려다 말았다, 이런 식으로). 언젠가 우리집 근처 책 대여점이 문을 닫으면서 책들을 1000원씩에 팔았는데, 단행본으로 나온 <알라딘...>을 그때 샀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 부분을 들춰 봤더니, 역시나 야했다. 97년인가는 친구로부터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빌렸다. 난 둘이서 하는 묘사가 몇십페이지에 걸쳐 있는 책을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하루의 말미를 준 친구의 협박 때문에 잽싸게 보려고 했는데, 새디즘, 마조히즘이 나오는 후반부에는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고 말았다. '이사람,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더니, 역시나 며칠이 못되어 그의 구속 사실이 뉴스에 나온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그때는 '마광수가 구속이니 장정일도 구속이지!'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건 창작활동에 대한 폭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빠진 것도 있었지만, 이게 내가 지금껏 읽어온 야한 책들의 목록이다. 참고로 <즐거운 사라>는 몇 년 전에 우리 할머니가 주셨고, 지금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한번 읽어 봤는데 뭐 별내용도 없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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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1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닐껄요 검은비님. 열화와 같은 성원이 몰아치며 연재를 외칠 것이고, 조금 연재를 하다 야한 소재가 떨어져서 잠시 쉬면 님의 소설에 중독된 사람들이 연일 대모대를 결성하여 님의 집 앞에서 '볼만하니 연재중지 왠말이냐 왠말이냐' '검은비는 책임져라 길고긴밤 책임져라'따위의 구호를 외칠껍니다. 물론 그 선봉대에 내가 떡 하니 서 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요. 우하하하
나는 포르노를 스물 여덟. 즉 작년에 처음 보았소. 순진하지 않고 성에 대해 무지 내지는 무관심한 나도 아닌데 어째서 저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를 일입니다만 아무튼 포르노라는 것이 생각보다 재미 없더군요. 순 남성 위주라서 그런지... 내가 본 가장 섹시한 장면은 순수의 시대에서 마차안에서 장갑 벗기고 맨손 만지기 씬이었소. 그게 그해 여성들이 뽑은 영화속 섹쉬 장면 1위였다고 하더라구요. 키스도 없고 옷을 벗기지도 않고 그냥 손을 좀 에로릭하게 잡을 뿐인데 그게 어찌나 섹시하던지... 지금도 그 장면은 생생합니다.

soulkitchen 2004-03-1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검은비님. 우리 친하잖아요. 웬만하믄 지금 시작하시죠..크헐헐..저 역시 포르노를 스물다섯 무렵에 봤는데, 야하다 더럽다는 느낌보다 안쓰럽더구만요. 안쓰런 마음에 껀수만 생기면 챙겨서 보곤 했었습니다. 책에서도 조금 야시럽다 싶은 부분은 기억해 뒀다가 몇 번을 다시 펴보고 그래서 나중엔 그 책을 펼치면 그 부분이 바로 떡 펴지곤 했드랬죠. ㅎㅎ

쎈연필 2004-03-1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뽀청천을 초등 육학년 때 첨 봤는데, 드러워서 그 후론 안 봅니다. 봐도 샅께가 반응도 안 하고. 검은비님, 몹시 보고픈 걸요! 그나저나 마태우스님 글 넘 재밌습니다ㅠㅠ "좀 틀어주면 안돼요?" 이 부분에서 스무 고개 자지러졌습니다. 거듭! "검은비님, 좀 연재해주면 안돼요?"

진/우맘 2004-03-13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이타닉...동감!
제게 있어 가장 섹시한 소설은 '상실의 시대'입니다. 다른 책에 실린 서문에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보고 새벽 네 시 남자친구의 기숙사 창문을 넘었다는 여자분의 팬레터가 언급된 것을 보면, 비단 저만의 일은 아닌가 봅니다. 특별히 야한 구석이 많은 것도 아닌데...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쉬 잠을 이룰 수가 없지요.
마태우스님, 무라카미 류는 안 좋아하시는지? 그의 소설에 묘사된 SM플레이는 어찌나 적나라한지....몇 권 읽고는 더 이상 못 읽겠더군요. 아직 안 보셨다면, 그리고 보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류의 소설은 제목이 청초할수록 야합니다. 반면 '69'같이 노골적인 제목은 야한 대목이 거의 없지요.^^

가을산 2004-03-1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각자 보았던 야한 책을 털어놓는 분위기네요.
제가 중학생이 되면서 어머니께서 큰맘 먹고 사신 50권짜리 두꺼운 세계 명작 소설전집 중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게 그당시 야한 책으로 꽤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을 읽어보니, 야한 부분도 있지만 근대적인 규범과 위선에 억눌린 귀부인이 맘 속으로 진짜 원하는 사랑을 찾는 것이 주제더군요. 아.. 약간 실망.

내친 김에 중학생때 친구에게 들은 가장 야~한 이야기. 남자와 잘 때 도대체 어떡하는거냐?
친구가 저를 비롯한 호기심에 넘치는 급우들 몇에게 큰 비밀을 알려주듯 해준 이야깁니다.
'먼저 샤워를 한다. 그담에 침대에 눕는다.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면 그담은 남자가 알아서 한다.'
끝. --;;

(이 이야기를 듣고 집에와서 입싸게 엄마에게 자랑했다는... 근데 정작 엄마는 친구가 그것만 이야기했을 리 없다고 믿지 않았다는 영양가 없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2004-03-13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갈대 2004-03-13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남자가 알아서 한다...ㅋㅋ 정답인네요!!

sooninara 2004-03-1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대단해요~~~'
저는 중학교때 가정시간에 남녀 몸그림보고..어떻게 정자와 난자가 만날까 혼자 추리해서..진실에 도달하곤...참 놀랐습니다..그리고는 혼자만 간직하고 아무에게도 말도 못했다죠^^
우리남편이 야한걸 안좋아해서 저는 유명한 O양비디오, B양비디오도 못봤습니다...
얼마전에 남편이 회사에서 선물로 'OOO기숙사'인가하는 포르노씨디를 가져왔는데 둘이서 조금 보다 관두었습니다. 처음보는 포르노인데... 참 벗고서 똑같은짓만 계속하는데..볼것도 없드만요^^ 너무 늙어서 처음 보니 맘도 두근거리지도않고...포르노도 볼 적기가 있나봐요

▶◀소굼 2004-03-1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에 성인만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해서; 검은비님의 만화를 특별연재토록;;[가당키나한 요구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