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건축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주위에서 인테리어를 해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게 뭐가 문제냐 싶지만,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건, 어떻게 좀 싸게 해볼까 하는 마음 때문이니 문제가 될 수밖에. 지금 그는 장인어른의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중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원래 4500 정도 되는 것을 2000에 해주기로 했단다. 장인이니 그럴 수 있다쳐도, 또다른 친척이 다른 데 알아보니 2500정도 드는 걸 "천만원에 해라!"라고 하는 모양이다. 우리집도 인테리어를 다시해야 하기에 좀 부탁을 해볼까 했는데, 그말을 듣고 관두기로 했다. 친구가 반값에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와 하청업체 마진을 다 포기한 덕분인데, 그가 산소만 먹고사는 사람은 아닌 터, 마진도 없는 공사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직장인은 각종 청탁에 시달린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자.

-대한항공 부기장인 내 친구 L, 친구들은 그와 만나면 언제나 이런 말을 한다. "야, 우리 스튜어디스들이랑 술한번 먹자" 어제도 그랬지만, 모임에 그가 나올 때마다 애들은 그런다. 혼자인 애건 유부남이건 소개를 시켜달라느니, 같이 놀자느니... 기장이면 스튜어디스를 아무 때나 동원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할 듯 싶다.

-나처럼 의대 언저리에 있는 사람은 병원 청탁에 시달린다. 난 학생 때부터 여러 사람들의 병원 예약을 해줬고, 내가 입원시킨 환자만 수십명이 넘는다. 예약 창구에서 "저..졸업생인데요"라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아는 선배에게 잘봐달라고 부탁도 해야하며, 그 사람이 외래에 오는 시간에 맞춰 맞으러 나가야 하는 등 귀찮은 일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별로 안친한 사람-예를 들면 엄마 친구의 친구의 조카-이 병원에 가야한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아들이 다 해줄거야!"라며 큰소리를 치셔서 나의 고난을 가중시켰다. 내 백이라봤자 사실 별거 없는데. 내가 입원시킨 환자들에게 문병을 가면서 "회진돌고 올께"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 청탁은 내가 한국 굴지의 병원인 S병원을 떠나서 천안에 내려오자, 시나브로 사라졌다.

-책에서 읽은 얘긴데, 기자들은 음주운전 뒤처리가 가장 고역이란다. 자기 친구 중에 기자가 있다는 건 사실 막강한 권력이고, 그래서 음주운전에 걸리면 "나 아는 사람 중 기자 있어!"라고 큰소리를 치게 마련이다. 내가 처음 책을 낸 출판사 사장은 유력지의 기자 출신인데, 언젠가 술을 잔뜩 먹고는 음주운전에 걸렸다. 그때 그가 기자증을 내밀자 경찰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 딱지를 떼기는커녕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까지 했다. 문학담당 기자는 이에 더해서, 지인들이 쓴 책을 대서특필해달라는 청탁에 시달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는 KBS 작가는 <개그콘서트>같은 인기프로의 방청권을 달라는 청탁에 시달린다. 언젠가 방송사의 높은 분이 "그런 청탁을 절대 금하겠다"고 했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개그맨들은 "웃겨봐!'라는 주문을 자주 받는다. 가수에게 "노래해 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건 그 직업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가 회사에서만 회사원으로 일하는 것처럼, 개그맨은 무대에서만 개그맨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생각없이 그런 말을 내뱉는다.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누군가를 돕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너무 무리한 부탁은 '의'를 상하게 한다. 지나친 청탁은 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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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3-0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글을 여는 책의 제목, 죽이는걸요. '연줄 타고 오는 봄'...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저서가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걸요?

비로그인 2004-03-0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정말 다양한 곳에서 벌어지는 청탁들. 거창하게 '청탁'까지는 아니라고해도, 알음알음 저 비슷한 일들이 주위에서도 많이 벌어지는 거 같아요. ^^

sooninara 2004-03-0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물에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이번에 비대위일을 하면서 저희도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서 연줄을 동원하느라 골몰했습니다..비대위언니중에서 20년만에 연락한 얼굴도 생각안나는 선배덕에 방송도 타게됐죠^^ 연줄이 필요하다는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대학병원에 수위아저씨라도 알아야지 편하다고 우스개로 하더이다..

비로그인 2004-03-0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 님께 한표!두표!세표......

연우주 2004-03-0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진/우맘님께 표 몰아드립니다~ ^^

플라시보 2004-03-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에 교통방송국 리포터질 할때 공항에 파견나가서 방송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시도 때도 없이 방송국 사람들과 연예인들의 비행기표 청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좌석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을 해도 마치 내가 한명 정도는 예약에서 밀어내고 집어넣을 수 있는 권력이라도 있는양 막무가내로 구해내라고 했죠. 그나마 평상시야 어떻게 말만 잘 하면 자리를 잡을수도 있는데 문제는 설과 추석이었습니다. 그때는 사실 그 누구도 자리를 빼 내는게 불가능 하거든요. 원래 항공사가 30% 오버 예약을 받기 때문에 그 날에는 각 항공사 티켓팅 장소에서 발권하는 직원들이 멱살을 잡히는 경우도 허다한데 거기다 대고 '저...자리 한개만'하는건 차마 못할 짓이죠. 부탁을 하면 자리가 없는 경우 예약 1순위에다 넣어야 하는데 그런 날에는 자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예약 1순위였던 사람은 제 청탁때문에 밀려나서 비행기를 못 타거든요. 그래서 늘 안된다고 말 해도 이 사람들 맨날 '어이. 그정도 입김도 없어?'하면서 칭찬인지 책망인지 모를 말들을 해 가며 부탁을 하더라구요. 아무튼 그때는 정말 악몽같았습니다. 하루에 평균 비행기표만 서너개 예약해서 발권하고 좌석배정(여기서 또 이코노미를 비지니스로 바꿔 달라고 난리입니다.)까지 받아서는 표 딱 들고 기다려야 했거든요. 난 살면서 별로 청탁같은거 안했었는데 그때는 정말 청탁을 많이 받은것 같네요. 잠시 그때가 떠 올라 주절거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