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제목은 플라시보님의 걸작 '이런 변이 있나'를 표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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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단
어제 점심 때, 담당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오후 일정은 아무래도 취소해야겠구요, 대신 내일 10시에 시험이랑 포스터 채점을 하기로 했으니, 좀 수고해 주십시오"
이 직장에 몸담은 이후 토요일에 간 건 열 번이 안되지만, 난 할수없이 오늘 출근을 해야했다.

어제 술을 마시는 내내 이렇게 말했다. "나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거든? 그래서 많이 마시면 안돼!" 물론 하는 말이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난 어제 모인 일곱명 중 가장 많은 술을 마셨다. 집에 와서는 어머님께 이랬다. "엄마, 나 내일 일찍 가야 하니, 여섯시에 좀 깨워줘!"

난 여섯시에 일어났고, 일곱시 반 차를 타고 천안으로 갔다. 교통상황을 고려해 좀 빨리 간건데 그건 기우였고, 내 방에 들어간 시각은 오전 8시 58분, 9시 전에 출근한 것도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2. 전조
시험지를 챙기러 사무실에 갔다. 담당조교는 출근을 안했고, 다른 조교가 "전 모르겠는데요"라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험장소로 갔다. 웬걸, 시험 십분 전인데 단 한명도 없다. 게다가 벽에는 한 장의 포스터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때 여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오늘 시험 안봐요?"
"그러게요. 저도 오늘인 줄 알았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담당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어, 어제 캔슬했는데...(취소라고 하면 될 것을, 대학에 있는 사람들은 꼭 문자를 쓴다) 제가 어제 연락 드렸잖아요?"
개뿔, 연락은 무슨... 난 내 휴대폰의 수신자 모드를 확인했다. 점심 때 이후, 그 인간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한통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연락을 안해놓고 미안하니까 연락을 했었다고 우기는 거다. 범죄자의 전형적인 심리라 할까.

그 사람의 동생은 원주에서 바닥재를 팔고있는 내 동생의 팀장인데, 동생은 나만 보면 이런다. "형, 그사람이 날 너무 괴롭혀. 형이 좀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면 안될까?"
그것도 모자라 그 형이 또 날 괴롭히다니, 우리 형제의 수난은 언제쯤 끝난단 말인가.

3. 상념
기차시간을 당긴 후, 역으로 달려갔다. 광절열두조충을 몇 마리 합쳐놓은 듯한 긴 줄 끝에 서서 생각했다. "내가 여기와서 한 일이 뭐지?"
-책 몇권을 우편으로 보냈다.
-역에 가다가 빙판에서 헛바퀴를 도는 차를 오분간 밀었다 (보람없게, 그 차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고, 운전자는 차를 버리고 도망갔다)
-쓸데없이 뛰다가 자빠졌다. 방수 바지라 젖진 않았지만, 쪽팔렸다.

그 인간이 전화 한통만 해줬으면 난 얼마나 한가로운 오전을 보냈을까. 벤지를 목욕시켰을테고, 글을 쓰고 책을 보면서, 혹은 오랜만에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겠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지 몰라도, 기차값을 버려가며 왔다갔다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4. 그래도 희망은 있다
줄 끝에서부터 시작해 표를 바꾸기까지-영악하게도 난 집에 갈 표를 미리 사뒀다-걸린 시간은 무려 30분이었다. 표파는 아가씨는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한시간 이상 지연돼도 지연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도장을 찍어줬다. 아닌게 아니라 대부분의 기차가 연착 소식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른 기차는 예정시간인 11시 27분에서 겨우 3분 늦게 플랫폼에 도착했다! 10시부터 11시 사이에  차가 몽땅 한시간 이상씩 연착한 판에.  역시 세상은 '줄'이다. 줄만 잘서면, 집에 빨리 간다. 행운은 거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내 옆에는 털 코트를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앉게 되었다!!! 물론 자빠져 자느라 내려야 할 영등포역에서 못내렸고, 잠에서 깨보니 험상궃은 아저씨가 내 옆에 앉아 있었지만, 오늘같은 아비규환에 이정도면 선방했다. 잘했다, 마태우스. 그나저나 그 담당선생한테는 어떻게 분풀이를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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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0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생스런 오전이셨을텐데, 글은 너무 재밌네요~ ^^ 형제의 수난이라니,인연도 참 묘하다는...담당선생한테 소심한 복수하고 나서, 어떻게 복수하셨는지 알려주세요~ *^ㅡ^*

가을산 2004-03-0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출근길에 등산화 신고 출발했는데도 6번 넘어졌습니다. 위안 삼으세요. ^^

Viewfinder 2004-03-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험을 위해 기르고 있는 기생충 몇 마리 없으세요?
같이 식사할 때 슬쩍 넣어드려도 좋을 듯...

진/우맘 2004-03-0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뷰파인더님! 기생충 범죄 0%를 위해 오늘도 뛰고 있는 기생충 탐정 마태수의 모태인 마태우스님께 어이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그러고 보니, 마태우스님께 잘 보여야 겠습니다. 자칫 밉보였다가 동양안충이나 폐흡충 같은 것들의 습격을 받게 되면 안 되잖아요. -.-
참, 저요, 책 뒤의 퀴즈 만점 받았습니다!

sooninara 2004-03-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것은 잘 생각이 안나고 요충이 쉬울듯합니다..^^

마태우스 2004-03-0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유파인더님/그렇게 하면 제가 의심받지 않을까요?
진우맘님/참 잘하셨습니다. 역시나 님은 훌륭한 독자십니다^^
수니나라님/요충을 걸리게 하려다, 제가 걸리기 십상일 듯 싶습니다....
앤티크님/담주 일정에 전부 불참하는 건 너무 유치하겠죠? 생각해 볼께요.
가을산님/여섯번 넘어지시다니! 관절은 괜찮으신지요?

비로그인 2004-03-0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방수바지 여로모로 좋네요!! 어머니가 고르셨나 보죠. 역시 어머니의 힘은 위대합니다.

플라시보 2004-03-0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고생스러우셨겠어요. 저는 일정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하지 않거나 약속을 해 놓고 지각을 하는 인간들은 용서를 못합니다. 왜냐. 제가 절대 그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험악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일정이 취소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락을 취하며 약속시간 또한 지역을 넘나들어도 왠만하면 지킵니다. 뭐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됩니다. 그런걸 제때 하지 않고 미루면 아무리 게으른 저 이지만 기분이 말도 못하게 찝찝 불안 합니다. 그 선생에게 복수는 글쎄요... 저도 늘 복수의 칼을 갈며 사는데 제 동생이 이러더군요. '언냐. 뭐든 억지로 복수하려 들지마. 가만 있다가 보면 언젠가는 원수의 시체가 강물위로 둥둥 떠 오는걸 목격할지니...' 제 동생은 부메랑 효과를 믿는 인간이라서 다른 사람한테 나쁜일을 하면 반드시 본인에게 다시 돌아간다고 믿거든요. 님도 편히 생각하세요. 뭐 그정도 잘못 했다고 강에 둥둥 뜨기야 하겠습니까 만은 적어도 강물에 빠지는 정도는 되겠지요^^

Viewfinder 2004-03-08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기생충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큰가 보네요, 육안에 금방 띄일만큼.
글 읽으면서 문득 자기가 기르는 미생물들에게 밥을 준다던 선배의 글이 생각나서
제안했는데 완전범죄에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나요.
그러고 보니 그 선배와 마태우스님, 안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학교도 같고 연배도 비슷하실 것 같고...

어릴 때 읽었던 흐릿한 기억으로는 홈즈도 범죄를 저지릅디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왓슨에게만 나중에 넌즈시 알려주는 완전범죄를...
마태우스님을 즐겨 찾는 알라디너들의 웃음과, 보다 유쾌한 세상 만들기에 일조하기
위해서라도, 꼭 분풀이에 성공하셔서 도일의 반열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