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좀 바쁜 날이다. 아침 9시에 회의가 있고, 그다음엔 수업이, 12시엔 다시 회의, 오후 다섯시엔 애들 평가가 이어진다. 저녁 때 있는 술자리를 어찌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판.
그런데...아침에 기차를 타고가다 창밖을 보니, 눈발이 휘날린다. 엊그제 배운 말대로 "야, 눈 잘나가네?"라고 탄성을 올렸는데, 기차역에 내려보니 장난이 아니다. 눈이 와서 마비가 되버린 어제 서울의 밤을 방불케 하는 교통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서 10분쯤 기다리다 버스를 탔다. 용케 자리까지 잡았는데, 다른 애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보니 50분간 기다린 애도 있는 모양이다. 버스는 아주 더디게 전진했다. 맘먹고 뛰면 10분도 안걸릴 터미널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25분이 지난 뒤였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리 봐도 길이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차들은 세월아 네월아 서있기만 한다. 그래? 그렇다면....요즘 허구헌날 술만 퍼마시느라 운동을 못했는데....
버스에서 내려 전화를 했다. "전데요, 아무래도 아침 수업엔 못가겠는걸요. 교통이 좀 안좋아서...하하" 그랬더니 다른 선생 뿐 아니라 학생들도 오지 않아, 오전 일정이 취소되었단다. 그렇군. 학생들도 오기 힘들겠군.
볼일이 있어 은행에서 20분쯤 시간을 보낸 후, 학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방수바지를 입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신발이 낡아서 물이 샌다. 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달렸다. 달리면서 보니 걷는 애들이 꽤 있다. '왜 뛰는 애들은 없는거지? 급할수록 달려가란 말도 있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걷는 애들은 내가 추월을 하니까 볼 수 있지만, 뛰는 애들은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 내가 못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속력을 높였더니 과연 젊은 남자애 하나가 열나게 뛰고 있다. 서서히 다가가 추월하는 찰나, 그놈이 날 힐끗 보더니 속력을 높인다. 생판 모르는 놈인데 말이다. 그를 보면서 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쟁의 원칙, 즉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실감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오래달리기엔 일가견이 있는 내가 아닌가.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추월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술을 마신 다음날은 꼭 그렇듯이, 설사기가 느껴졌다. 그럴 때는 빨리 달려서 화장실에 가는 게 낫다는 설과, 달리는 건 설사를 촉진하니 천천히 걷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는데, 후자를 택하다 집앞에서 사건을 친 이후 난 되도록 전자를 따르려고 한다. 하지만 설사는 내 다리 근육으로 가야 할 혈액을 상당부분 장 쪽으로 이동시켰고, 힘이 없는 난 결국 그놈을 놓치고 말았다. 나쁜 녀석, 남의 위기를 이용하다니.
걷는 둥 뛰는 둥 400미터를 가니 어느덧 학교가 보인다. 잽싸게 일을 본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헬리코박터를 죽이는 '윌'을 마신 뒤, 젖은 양말을 널어놓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집을 나온 시각은 7시고, 도착한 시각은 10시 10분, 그쯤되면 양호한 편이다. 천안에 사는 내 조교선생은 50분만에 버스를 잡아탔으며 다시 50분이 걸려 터미널을 지났다니, 지금쯤은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여기 온 이후 출근이 오늘처럼 보람있는 날은 처음인데, 그게 다 눈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철도 모르고 내리는 눈을 비난하겠지만, 내가 눈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