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aladin.co.kr/cover/8932880689_1.gif)
동성애자인 록 허드슨은 여자와 결혼을 한 적이 있다. 왜일까?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나돌자 인기하락을 염려한 기획사에서 그를 강제로 결혼시킨 것. 물론 그 결혼이 행복하게 끝났을 리는 없었고, 허드슨은 그녀와 헤어진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동성애자였단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팬과 결혼을 하는데, 그건 그 여자가 워낙 열렬히 구애를 해온 탓도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이런저런 소문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게 더 큰 이유였나보다. 그의 결혼생활 역시 매우 끔찍한 것이었다고 책에 씌여있다.
준재벌의 아들이 맨날 술만 먹는 알콜중독자에다 상습적으로 카드빚을 지는 대책없는 사라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결혼을 시켰다. 그는 술을 마시고 아내를 폭행하며, 여전히 많은 카드빚을 양산한다고 한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지 모르겠지만, 결혼은 둘 사이의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혹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 결혼을 시킨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내게는 외삼촌이 한분 계시다.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된 할머니가 삼촌을 입양하셨는데, 그 삼촌은 나중에 자라서 할머니의 큰 짐이 되었다. 고교와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이래, 삼촌은 단 한번도 한달 이상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빽을 써서 넣어준 회사에선 번번히 사표를 냈고, 카센터를 한다고 하다 돈만 날렸다. 십분 정도만 얘기해 보면 모자란 사람이란 게 드러나는지라, 아무리 빽이 좋다한들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을게다. 삼촌의 연배가 지금 46이니, 벌써 20년째 놀고 있는 셈이다. 앞의 17년은 할머니가 집을 줄여가며 생활비를 댔고, 그 후 3년은 우리 어머니가 돈을 부쳤다. 어머니가 약속한 생활비 보조는 이번달이 마지막이었는데, 삼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된다.
택시운전을 하라는 압력을 "애들 교육상 지장이 있다"는, 별로 합리적이지 않게 들리는 논리로 뿌리치며 무직 생활을 해온 삼촌은 불행히도 성격 또한 그리 좋지 않아,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어온 외숙모에게 언제나, 별거 아닌 일로-우리 앞에서도-악을 쓰기 일쑤다. 얼마 전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응급실에 모시고 갔는데, 병원비를 내려고 찾아간 우리 어머님께 이렇게 말했단다. "할머니 점심값하고 택시비 내가 썼는데, 그거 물어주시유" 나중에 알고보니 할머니는 점심을 드시지 않았고, 택시비 또한 할머니가 쓰셨단다. 언제나 얇디 얇은 지갑을 열며 "돈이 없어 죽겠다"고 소리를 치는 삼촌은 어떤 관점에서 봐도 그다지 좋은 가장은 아니다.
한번의 파혼과 한번의 이혼을 거져 지금의 외숙모와 결혼한 삼촌은 애 둘을 낳았는데, 내가 보기엔 그 애들 둘다 삼촌보다 훨씬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 같다. 신통하게도 공부를 제법 잘하는 큰애는 어찌나 생각이 깊은지 내가 놀랄 정도인데, 그네들이 대학에 가고나면 참고 살았던 외숙모는 이혼을 요구하지 않을까 싶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처가에서는 삼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데, 삼촌은 "자식들마저 날 무시한다"고 가끔 울분을 토한다.
어찌되었건 외숙모를 볼 때마다 난 사실 죄인이 된 기분이다. 외숙모는 사실 삼촌의 아내로 살아가기엔 너무 아까운 분이시니까. 외숙모와 삼촌이 결혼에 합의하면서 양가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엔 나도 참석했다.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난 그날 엄청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외숙모를 타일러서 삼촌과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같으면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의 난 그러지 못했고, 결국 둘은 결혼했다. 모르긴 해도, 아니 100%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만, 숙모는 이 결혼을 굉장히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숙모의 눈에 뭐가 씌웠는지 난 알지 못하고, 내가 말렸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결혼이 나로 인해 깨진다 하더라도, 다른 여자가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자리에서 침묵을 지킨 건 옳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나 또한 그 결혼의 공범인 셈이다.
물론 삼촌은 동성애자가 아니니, 그 결혼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꿈이 많았을 외숙모의 삶은 회한으로 점철된 것이 되어 버렸다. '있어 보이는' 것을 빌미로 삼촌을 결혼시킨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 자리에 참석해 신뢰감을 더해준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침묵을 지킨 나는 록 허드슨을 결혼시킨 기획사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우리 중 아무도 합격을 예상하지 않았지만, 삼촌은 몇 년간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했다. 3번째로 낙방한 작년도에 '포기'를 선언하긴 했는데, 이쯤되면 이제 뭔가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도 할만 하건만 앞으로도 계속 놀 태세다. 택시운전보다 무직이 자녀교육에 더 좋다는 논리를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혹시 노는 것이 몸에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열심히 살려고 버둥거리는 사람이 수두룩한 이때, 삼촌의 젊은 나이와 건강한 몸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