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나오신 걸 보고 전화드렸어요."
전화를 받는 내내 난감했다.
'배가 산처럼 나왔다'는 증언으로 볼 때 그 환자분은 절대로 기생충에 걸린 건 아니였으니까.
하지만 그 환자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게 전화를 한 것,
난 할 수 없이 천안으로 내려와주십사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와 함께 온 그 56세 환자는 정말 배가 남산만하게 나와 있었다.
임신 말기의 배부름과도 상대가 안될 정도로,
언니 말에 의하면 체중이 원래 45킬로인데 75킬로가 되었단다.
6년 동안 계속 커지기만 한 그 물체의 정체가 뭔지 난 모르겠지만,
원자력병원,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안다녀본 병원이 없음에도
그녀의 병은 낫질 않았다.
수술을 시켜달라고 해도 안된다고 하는 걸 보니 뭔가가 있긴 한 모양인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환자분의 말씀으론 평활근세포 종양이란다 (근데 수술은 왜 안되지?)
거기에 대해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한 환자분의 유일한 희망은
열치료였다.
5년 전 감기에 걸려서 열이 많이 났는데
그때 그 종괴의 크기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
게다가 독일어로 된 관련 문헌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보면 자기와 증상이 비슷하고,
그때도 열로 치료를 했다는 거다.
어느 의사도 환자가 원하는 방식, 그것도 과학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방식으로 치료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환자와 언니가 아무리 열치료를 해달라고 졸라도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의사는 없었단다.
"그래도 선생님만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시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워낙 아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천안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만약 그 환자였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열이 나게 했을 거다.
어차피 의학이 포기한 질환이니 다른 방법을 써보는 수밖에 없잖는가?
이 환자, 다시 한번 감기에 걸리고자 한시간 동안 비를 맞기도 했고
아프리카 가서 말라리아에 걸리려고도 했고
고추가루를 국수에 타서 먹기도 했다는데
정말 안스럽지 않은가?
그 환자와 근 한시간여 동안 머리를 맞댄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갑상선 호르몬제를 드시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부작용으로 열을 내는 약제가 있긴 하지만
그건 좀 말이 안되는 것 같고,
안그래도 환자가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있다니
그것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뒷날 어떤 일이 있을지 겁이 나서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고 드시라"고 했지만(종이에다 그렇게 써줬다)
환자에 관련된 일인지라 여전히 조심스럽긴 하다.
내가 기초의학을 한다는 게 안타까운 건,
이 경우 내가 자의적으로 처방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고,
내가 기초의학을 해서 다행스러운 건
내 성향으로 보아 이렇게 자의적으로 처방을 해 여러 환자를 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