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마음잡고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실 말고 실험실에도 컴퓨터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하나 샀다.

노트북은 도난의 염려가 있는지라 아는 사람에게 문의했더니,

'켄싱턴'이라는 첨단장비를 가르쳐 준다.

암호로 된 자물쇠를 테이블 같은 데 연결해 노트북을 묶어놓는 장비,

난 세자리 숫자로 된 번호를 입력했고, 켄싱턴 덕분에 도난 걱정이 없이 살았다.

구글에서 퍼온 사진입니다


 

얼마 전부터 노트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

참고 쓰려고 했지만 논문을 쓰려고 해도 인터넷이 필요하고,

연구원 선생님이 여가 시간에 고스톱도 쳐야 하는지라 하루빨리 고쳐야 했다.

아는 분한테 말했더니 노트북을 가져오란다.

노트북을 가져가려고 했더니 켄싱턴이 발목을 잡는다.

내가 아는 모든 번호를 동원해 봤지만 켄싱턴은 열리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봤더니 "000부터 다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파는 쪽 홈페이지엔 "비밀번호 분실은 책임지지 않는다"고 친절하게 씌여 있다.


그래서 난 마음을 잡고 앉아 000부터 하나하나 번호를 맞추기 시작했다.

000부터 100번까지 하는 데 대략 7분이 걸렸다.

이런 식이면 1시간이면 하겠구나 싶어 더 열심히 했다.

500-그러니까 목표치의 60%-까지 돌렸을 때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999까지 다 해봤는데 안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 말이다.

이론적으로야 1000가지 조합 안에 비밀번호가 있지만,

숫자의 줄을 잘 안맞춰서 안열린 것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해봐야 하잖는가?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는데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더해져 짜증이 확 치밀었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숫자판을 아무렇게나 돌렸다.

"덜컹!"

그 소리가 내게는 너무도 크게 들렸는데,

난 그때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켄싱턴이 열려 있다.

만세를 부르다 번호를 확인해보니,

그 번호는 연구원 선생님의 전화번호였다.

내가 아는 번호를 죄다 투입해도 안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는데,

마음을 차분히 먹고 조금 더 돌렸다면 금방 열릴 거였다.


숫자가 세자리니 다행이지, 네자리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낯익은 연예인을 보고 "쟤가 누구지?" 하는 기억력을 믿고 적어놓지도 않은 자신을 책망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켄싱턴이 있다해도 누군가 이걸 훔쳐갈 마음만 있다면,

한시간 정도만 마음잡고 번호를 돌리면 훔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그러고보면 비밀번호의 첫 자리가 후반부인 건 참 다행이다.

당장 마음이 급한데 한시간이나 번호를 돌리고 있을 도둑은 없을 테니 (999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돌려보는 도둑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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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발명품 2008-10-12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 전에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음악 자료가 담긴 하드를 도둑 맞은 사람 얘기를 들었는데 참 안쓰럽더라구요. 켄싱턴이란 건 좋은 거 같은데 비밀번호가 3자리인 건 좀 찜찜하네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순오기 2008-10-12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고생하셨어요.
우린 여행가방 비번을 잃어버려서 아들녀석이 죄다 맞춰가며 찾아낸 적이 있었지요. 번호가 후반부라 한참 했었죠~ㅋㅋㅋ

세실 2008-10-1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딸내미 휴대폰 사줬더니 비밀번호 걸어놓고는 잊어버려 제가 30분동안 번호 조합한 끝에 극적으로 성공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 열받아~~)
님 우리 나이엔(뭐 한살 정도야 ㅎㅎ) 수첩에 적어 놓는것이 필요합니다.

마법천자문 2008-10-1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집털이들이 쓰는 수법인데, 비밀번호를 누르는 번호판에 특수물질(그냥 밀가루라던가 어쨌든)을 뿌려서 손자국 흔적이 많이 보이는 키를 중점으로 조합해서 알아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 대도 루팡 선생인지 조세형 선생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stella.K 2008-10-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질랜드나 북유럽의 어느 도시 이름인 줄 알았어요. 그래도 뭐 다행이네요.^^

비로그인 2008-10-13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래서 비밀번호를 아예 친구 생일로 해두었어요. 친구 한 명 딱 잡아서, 그 친구의 생년월일과 그 친구의 이름과 생년월일로 한 것이지요. 그 친구가 알면 `왜 하필 나를?' 하겠지만 혹여나 비번을 잊더라도 시침 뚝 떼고, `네 생일이 언제였더라?'하면 되니까요. 실은 이건 하루키의 소설에서 빌려온 기법이에요. 역시 책에선 배울 것이 많아요.

마태우스 2008-10-2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역시 책에서 배울 게 많군요! 근데 어느 친구인지 그게 헷갈리면 어떡한답니까.... 전 그럴지도 몰라요 ㅠㅠ
스텔라님/안녕하셨어요. 저도 켄싱턴이란 말, 그때 첨 알았어요.
prelude님/이미지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프리루드님 안녕하셨어요. 글고보니 님 루팡 같아요
세살님/맞아요 수첩에 좀 적어놔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죠... 글고 우리나이라고 같이 묶어줘서 고마워요 친하게 지내요!
순오기님/호홋 그런 경험은 다 있으시군요!! 정말 우리나이란.....ㅠㅠ
발명품님/그죠? 3자리라는 게 좀 그렇죠? 네자리 켄싱턴도 있긴 있지만, 그랬다면 전 아직도 비번 못알아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