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을 스캔할 일이 있었다. 스캐너도 없고 할 줄도 몰라 다른 과 조교선생에게 부탁을 했다. 그전에도 두어번 같은 부탁을 한 적이 있기에 다음날 올 때 문화상품권을 몇장 선물했다. 그녀도 가만 있지 않았다. 고맙다면서 내게 책 두권을 선물했으니까. 그 중 하나가 바로<회랑정 살인사건>이었다. 내가 그렇듯이 그녀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이 책을 읽었을까봐 걱정했다고 수줍게 말했다.
내가 요즘 산 책들의 운명이 다 그렇듯이, 그 책은 며칠간 내 연구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난 연구비 때문에 대전에 갈 일이 있었고, 며칠간 읽던 책을 출근길에 다 읽었기에, 대전행 버스를 타러 갈 때는 <회랑정 살인사건>을 가져갔다. 그 덕분에 대전을 오가는 동안 난 전혀 심심하지 않았고, 연구비 발표를 하는 동안에도 책을 읽고 싶어서 안절부절했다. 내일까지 마감해야 할 논문이 있는지라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한 네시간 정도는 써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고, 중간까지 읽었던 그 책을 다시금 집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7시 반, 써야 한다는 고찰 부분은 아직 한줄도 못썼다 (딱 한 단어, ‘The’만 써놨을 뿐이다). 과연 오늘 밤 안에 집에 갈 수 있을까? 아마도 틀린 것 같다. 새벽 두시 경에라도 집에 가려면 지금부터 한눈 팔지않고 논문을 써야 하지만, 그래도 시원하다. <회랑정>을 다 읽어버렸으니까. 책을 읽지 않고 버텼다면, 논문은 계속 쓰지 못한 채 책만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인가? 외딴 섬에서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있었다. 난 그걸 소설로 읽지 않고 어릴 때 5회로 연재된 라디오 극으로 들었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그 닷새간 잠을 설쳤다. <회랑정>을 읽으니 그때 생각이 난다. 이 책은 그러니까 급히 해야 될 일이 있는 사람은 읽어선 안된다. 시간이 많고 무료할 때, 특히 주말에 읽을 것을 권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추리소설이 잘 안팔린단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추리의 불모지가 된 게 음모로 얼룩진 우리 정치판 때문이라고 하던데, 감히 장담하건데 우리 정치판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만은 못하다. 그나저나 논문을 써야 하는데, 18분을 또 리뷰 쓰는 데 허비했으니 귀가 시간은 더 늦어질 전망이다. 미녀 아내를 혼자 남겨둔 비정한 남편, 그 아내는 내가 이런 짓을 하느라 늦게 가는 걸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