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수많은 우연의 결정체이듯, 책과 사람의 만남 역시 만만치 않은 우연의 산물이다. 지난 일요일 난 배탈이 나서 배가 아팠고, 아픔을 이기기 위해 초저녁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깼을 땐 배가 조금은 나은 것 같아, 뭘 할까 고민하다 먼지가 쌓인 책장을 뒤진 끝에 뒤렌마트가 쓴 <약속>을 꺼냈다. 이 책을 왜, 언제 샀는지 기억이 안나는 걸로 보아 이 책이 내 방에 있는 데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것보다 더 큰 우연이 깃들여 있으리라.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이런 식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도무지 단서를 잡을 수가 없다. 그때 기괴한 모습의 탐정이 나타나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결국 범인을 잡는다. 어떻게 잡았냐고 물으면 탐정은 온갖 잘난 체를 다 해가면서 설명을 해준다. 그 잘난 체가 좀 지나쳐, 내가 경찰이라면 설명을 듣지 않고 그냥 범인을 끌고가고 싶을 정도. 범인으로부터 자백을 받으면 되는데 추리 과정을 뭐하러 안담?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예상하는 그런 류의 추리소설은 아니다. 책에서도 지적하지만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 중 명석한 추리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게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 소설에는 포와르가 하는 것같은 대단한 추리는 나오지 않지만, 그래서 그런지 우리 현실과 잘 부합하는 듯하며, 막판에 노부인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반전은 이 소설의 재미를 한껏 높여주는 요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주인공에 있다. 주인공은 박사학위도 딴 유능한 경감인데, 이름이 마태다. 물론 내 이름은 ‘마태우스’지만, 편의상 다른 서재인들이 ‘마태님!’ 하고 부르며, 나 역시 ‘마태예요’란 댓글을 즐겨 단다. 내가 주인공이 된 추리소설이라니, 누군가가 쓴 <소설 마태>가 소설로는 영 꽝이어서 아쉬웠던 터라 제대로 된 소설의 격식을 갖춘 이 책에 별 다섯을 준 건 지극히 당연하다. 추리소설의 대가이신 물만두님이 혹시 이 책을 읽었을까 싶어 리뷰를 살펴보니 과연 있다. ‘걸작’이란다. 다른 이유를 붙여 놨지만 물만두님 역시 주인공이 마태라는 점에서 친근감을 느껴 다섯 개의 별을 선사한 게 아닐까. 만두님의 리뷰를 읽다가 내가 왜 이 책을 샀는지도 알게 되었다. 댓글을 보니 내 비서가 거기다 ‘자꾸 살 책만 늘어나네요’라고 써놨고 만두님은 “절판될지 모르니 어서 사라”고 답변을 해주셨다. 내가 알라딘에 온 건 우연이지만, 여기 온 이상 만두님을 아는 건 필연이고, 그분의 리뷰를 읽는 것 역시 필연일 수밖에. 그러니 <약속>은 한번의 우연과 여러번의 필연으로 만난 책이고, 그 만남은 다행스럽게도 즐거웠다. 지금 난 배가 안아프며, 삼겹살 3인분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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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6-12-05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마태님의 깬 시간과 춘의 잘 시간이 일치하는군요. 브라보~

stella.K 2006-12-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어요. 뒤렌마트. 언젠가 그의 단편희곡을 읽은 적이 있었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인상 깊어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읽으셨네요. 마태님 책도 재미있어요. 님은 그로테스크하면 안 돼요. 재미있어야죠.^^

마냐 2006-12-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 책을 만난 과정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한편의 추리소설이군여...ㅋ

H 2006-12-05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렌마트의 책은 정말 그로테스크하다라는 말이 딱 맞는 듯..>.< 노부인의 방문도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moonnight 2006-12-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배탈이 나으셨다니 좌우지간 다행입니다. 마냐님 말씀처럼 리뷰가 추리소설읽는 기분이에요. ^^;;; 넘나 훌륭한 책.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06-12-30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님/님의 훌륭한 댓글에 경의를 표합니다
에고이스트님/아 님은 이미 뒤렌마트를 알고 계셨군요. 정말이지 방대한 책 고수의 세계....
마냐님/부끄럽사옵니다
스텔라님/어맛 제 책을 언급해주시다니....부끄럽고 황송합니다 꾸벅
춘님/요즘 너무 제게 뜸하신 거 아니어요????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