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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과 비 1 -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원작소설!
이병주 지음 / 그림같은세상 / 2020년 5월
평점 :
바람과 구름과 비碑 (1권)
이병주, 그의 글은 그윽하다.
그윽하다는 말은 깊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글이 어디 그윽하기만 한가? 길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글은 유장(悠長)하다.
유장한 것은 이런 대하소설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가 집필한 대하 역사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碑』를 손에 들면서 느끼는 감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글이 그렇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책을 대할 때는 어떤 설렘이 앞선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몇 번째 대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의 글을 펼치면 설렌다. 더하여 책에서 묵향의 내음을 맡는다. 글이 새겨진 종이에서 배어있는 향기를 맡는 기분이 든다.
이런 대하소설, 결코 서두르지 않고 깊은 물을 이루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이야기는 서서히 흘러간다, 10권이니, 1권을 읽으면서는 그저 나타나는 인물들 형체만 익혀도 좋다.
아까운 그릇, 어긋난 인물, 최천중
우선 등장인물부터 살펴보자.
먼저 주인공인 최천중.
장소와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 조선조 말기, 그야말로 나라는 풍전등화, 세상은 혼탁의 시대, 그런 시대가 최천중 같은 걸물을 만들었다.
그를 설명하는 여러 문장이 있다.
아까운 그릇인데 때가 어긋난 인물 (216쪽)
그에겐 상도(常道)가 비도(非道)다. 즉, 범상한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이 될 생각은 없고 용을 만들 작정이다. (218쪽)
여주 신륵사에 묵고 있던 그의 시야에 포착되어 이윽고 등장하는 인물은 미원촌의 왕씨 부인이다. 그녀를 통하여 최천중은 천하를 얻으려는 꿈을 꾼다.
이 책은 그런 꿈의 기록이다.
그의 꿈을 이루는데 각각 한 몫을 담당하게 되는 인물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데, 각 사람마다 연결되는 그 인연을 맺어주는 이야기가 재미를 만들어준다.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 최천중이라면 여주인공은?
단연코 황봉련이다.
황봉련과의 만남, 요즘 같으면야 자전거를 타고 가다 부딪혀 인연을 만들지만 어디 이런 역사물에서 그런 일이 가당하겠는가? 그 둘의 만남과 남녀로서의 섞임은 한 폭의 그림으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활동사진으로 묘사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이런 리뷰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인 이병주 선생의 동서고금의 온갖 서적을 인용하는 그 솜씨에 독자인 나는 그저 감탄하고 경탄한다. 그의 붓에서 자유자재로 흘러나오는 경전들, 시문(詩文)들, 사연들이 줄줄 흘러나오며 엮여지는 글들을 놀람으로 맞이하고, 기쁨으로 음미하게 된다.
황봉련, 『장자』를 논하다
이런 글, 읽어보자.
먼저 저자는 최천중을 ‘장자를 숭앙’하는 인물로 설정한다. (34쪽)
그런 다음, 황봉련의 입으로 『장자』를 들려준다.
최천중이 ‘침어낙안 폐월수화 (沈魚落雁 閉月羞花)’를 거론하자, 황봉련이 답한다.
본래의 뜻은, 인간 세상에서 일컫는 아름다움이란 별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전 풀이했어요. 침어낙안이니 미인도 보잘 것 없는 것이고, 폐월수화니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장자는 말한 거예요. (267쪽)
맞다. 황봉련이 말한 게 맞다.
『장자』에는 이렇게 나온다.
사람들은 모장과 여희를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녀를 보면 깊이 들어가고 (魚見之深入)
새들이 그녀를 보면 높이 날아가고 (鳥見之高飛)
고라니와 사슴이 그녀를 보면 반드시 달아난다.
이 넷 중에서 누가 올바른 미색을 안다고 생각하는가?
(『장자』 <제물편>, 기세춘 역, 95-96쪽)
그러니, 그 뜻이 다른 의미로 관용적으로 굳어져 버린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집념이란, 그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 갖지 않은 사람에겐 원래 터무니가 없어 뵈는 그런 것이기도 하다. (13쪽)
미지(未知)의 시인을 대한다는 것은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81쪽)
도를 통한 사람은 천자문에서도 천리(天理)를 읽는 법이다. (95쪽)
달빛 아래 보아야만 그 진미를 알 수 있는 꽃이 있고,
햇빛에서 보아야만 진미를 알 수 있는 꽃도 있다. (350쪽)
이런 글, 생각을 키운다
이런 대화 읽어보자.
- 조물주는 왜 이런 것까지 만들어놓았습니까?
- 다 뜻이 있을 것이다.
- 그 뜻을 알고 싶단 말입니다.
- 몰라도 되는 건 알 필요가 없지.
- 그래도 꼭 알고 싶은걸요 뭐.
- 그런데 알고 싶으면 왜 공부는 하지 않고....(303쪽)
이런 글 읽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기쁨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 한 수 외우고 싶다.
情多處處有悲歡 정다처처유비환
何必?桑始浩歎 하필창상시호탄
다정한 사람은 무엇에건, 어느 곳에서건 슬픔과 기쁨을 느낀다.
천지가 진동하는 대사건이 있어야만 큰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73쪽)
어디 이것뿐인가. 도처에 꽃처럼 피어 유혹하는 시들을 만나 그 뜻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한시의 그윽함에 반하게 될 것이다.
이병주의 손에 의해 창조된 여인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읽어보는 이병주의 글이기에 다시 한번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참으로, 흥미 있게, 셀레어 가면서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이 아까워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음미해 가면서 읽었다.
이번에는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며 읽었다.
이병주, 그가 쓰는 문장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 문장에 반해, 그 문장을 타고, 그 문장이 보여주는 정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여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저자의 붓끝을 따라가 보면,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서 울려퍼졌던 아담의 감탄사가 다시 재현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황봉련이 가마를 타는 장면이다.
황여인은 우아한 동작으로 가마에 올랐다. 그 동작이 구 총각의 눈엔 한 폭의 그림이었다. (200쪽)
이 글을 읽고, 잠시 그 모습을 그려본다.
아직 여인을 모르는 구 총각의 눈엔 황봉련의 존재 자체가 우아함 자체였을 것이다. 그 우아함이 살아 움직이며 사뿐히 (이런 표현 용서하시라, 이 정도 단어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나의 치졸을!) 걸어 가마에 오르는 모습은? 천상의 선녀가 하강한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그의 뇌에서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 가지고 감탄하고 말고 하느냐고?
그럼, 다른 정경, 여인이 등장하는 그림과 그림, 보러 이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지? 내 필력이 달려, 묘사를 못하는 거, 안타까울 뿐!
사족, 하나
이 소설이 드라마화 되어 독자들을 만난다 하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염려되기도 한다. 최천중의 역을 맡은 탈렌트가 과연 그 역을 제대로 풀어낼지, 아니면 소설 속에 이미지로 남아있어야 할 그 모습이 의외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지? 그래도 일단 기대를 해보자. 이번 주 일요일 밤이다. 5월 17일 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데....그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