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이번에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저 실존주의라는 이미지가 왠지 모르게 니체를 떠올리게 했고, 니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서(하...니체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었음에도 워낙 선명한 첫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ㅠ), 그런지 키르케고르 역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이게 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나마 윤리시간에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었으니 이마저라도 희미하게 알고 있는 거지 싶기도 하다.
책 안에는 시작부터 테스트가 등장한다. 일명 "당신의 절망은 어떤 타입일까?"다. 절망에도 타입이 있다니...!
꽤 흥미로웠다. 원래 심리테스트를 비롯하여 테스트는 해봐야 맛이 아닌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니 누구나 해볼 수 있다.
저자가 심심해서 테스트를 만든 건 아니고, 테스트를 하고 나면 내가 어떤 절망의 타입인 지가 확인된다.
참고로 절망의 타입은 총 4가지가 있다. 무한성의 절망, 유한성의 절망, 가능성의 절망, 필연성의 절망이다.
테스트가 끝난 후 옆 장을 보면, 해당 타입에 대한 내용이 어디에 쓰여있는 지 안내가 되어 있다. 내 테스트 결과는 3번째인 가능성의 절망이었다.
우선 각 장에는 키르케고르와 내담자가 등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인지라, 등장인물들 역시 일본 이름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상황의 절망에 처해있다. 내가 마주한 가능성의 절망의 주인공은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보통의 상담자와는 확연히 다른 키르케고르만의 대화가 진행된다. 내담자를 내쫓으려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참고로 저자는 키르케고르의 죽음의 이르는 병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내담자만큼이나 나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도 펼쳐진다. (저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뭐라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같은 대사가 등장해서 순간 당황했다.) 각 상황 속에서 키르케고르는 타인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길 강조한다. 모든 상황의 시작은 나다. 내가 아닌 타인을 보기 시작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책은 절망에 관한 책이니, 절망에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먼저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절망의 원인도, 벗어나는 법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까도 말했듯이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약점과 마주하고, 드러내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그저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도망치거나 눈을 가려보이는 방식으로는 내 안에 절망과 마주설 수 없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왔기에 낯설기도 하고, 진실에 가 닿을 자신이 생기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마주하지 않는다면, 절망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책 속에 여러 내담자들은 각자 절망의 모습이 다르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는 한결같은 어조로 나와 타인을 분리하길 요청한다. 8가지 사례 속에서 우리는 절망을 향해 다가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키르케고르다. 각 상담을 마친 후 내담자들의 이후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한줄평이 등장한다. 소설 같은 느낌으로 구성되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고, 중간 중간 아리송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철학이라는 이름이 주는 어려움이 한결 상쇄된 느낌이다. 마치 철학자와 내담자의 대화 형식의 구성 덕분에 아들러 심리학 미움받을 용기가 떠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