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일기 - 조선의 미래를 고민한 실천적 지성의 기록 클래식 아고라 4
이이 지음, 유성선.유정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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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살피건대, 조정에서는 분별력이 매우 중요하다.

분별력이 없으면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다.

지금 사림들의 싸움은 모두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읽다 보니 건너뛰기 어려워서 계속 읽게 되는 시리즈가 있다. 아르테의 클래식 아고라 역시 그중 하나이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 클래식 아고라는 난이도가 있다. 우리의 고전을 마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미 한 발을 담그고 있기에(삼국유사와 의산문답.계방일기를 읽었다.), 경연일기 역시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겁이 났던 이유는 저자가 주기론, 성리학의 대가 율곡이이였고,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 중의 벽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겁을 먹었던 것과 달리 술술 읽혔고 재미도 있었다.

우선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경연(국왕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 중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를 불러서 경전 및 역사서 등을 강론하던 일 - p.555 해설 중)을 일기 형식으로 담은 글이다. 경연일기를 다른 이름으로 석담일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수업 내용이라기보다는 마치 우리의 역사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조선시대에 교과서나 사극 등을 통해 익숙히 들어왔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이 버전의 인물평을 담은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주석이 무려 349번까지 있는데, 그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인물에 대한 주석이기 때문이다. 주석으로 다루지 않은 인물들도 있으니 적어도 340명 이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저 인물평만 다룬다면 조금 과장해서 가십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에는 인물평과 함께 이이의 입장에서 현실을 돌아보고, 인물들의 과오와 함께 진정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명종 20년인 1565년(을축년) 7월부터 시작하여 선조 14년인 1581년(신사년) 11월까지 17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나라의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율곡 이이는 상황과 인물을 바라보는 눈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에는 임금 사후 장례의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대윤(윤임파)과 소윤(윤원형파)로 불리는 드라마 여인천하 속 이야기가 재연된다. 주초위왕으로 몰려 죽은 조광조도 만날 수 있고, 율곡 이이와 함께 성리학의 거두로 불리었던 퇴계 이황, 성혼, 김성일, 정인홍 등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상복 논쟁에 대한 이야기와 흰 무지개의 등장(?)으로 삼정승이 사직을 청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또 특이한 기억 중에 하나는 선조에 대한 평이다. 지금은 이순신을 괴롭힌 천하의 악질이자 리더십 없는 군주로 악명이 자자한 그였지만, 초반에도 나름 괜찮은(?) 인물이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선조다. 예절을 알고, 겸손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눈이 뛰어났던 그이지만,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적어도 초반에는 괜찮은 인물이었다는 이이의 평이다.

해설을 읽어보니, 이 책이 왜 율곡의 제자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해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의 신랄한 평이면 당연히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 갈등이 붉어질 수 있을 법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성리학자는 앞뒤가 막힌 지극히 예절만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달리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는 역시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 안에는 예절을 따지는 부분이 없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조선의 미래를 고민했던 실천적인 지성 율곡이이의 경연일기.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조선이라는 사회 속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또 다른 면모를 속속들이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삼가 살피건대, 조정에서는 분별력이 매우 중요하다.

분별력이 없으면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다.

지금 사림들의 싸움은 모두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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