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죽이거나 - 나의 세렝게티
허철웅 지음 / 가디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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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햇빛 아래 서 있는 걸 환영한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음성은 부드러웠고 무거웠다.

'햇빛 아래 서 있다'는 말이 우리 종족에게는 살아 있는 서로를 축복하는 인사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특유의 체취가 없는 사자 씸바(사자) 다씸바와 색을 또렷하게 구별할 줄 아는 음윰부(누) 응두구. 세렝게티 초원에서 벌어지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물을 떠올리면 자연히 떠오르는 동물은 사자다. 어린 시절 동물 관련 다큐를 볼 때면 이동하는 초식동물들 무리를 잔인하게 공격하는 사자의 모습을 보며 사자는 나쁜 동물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무리가 집요하게 누를 뜯어먹는 하이에나에 대해서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누 응두구와 사자 다씸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음윰부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아버지를 잃고 만 응두구는 형 호다루의 돌봄을 받고 자란다. 그날,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피시(하이에나) 무리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하이에나들을 쫓아냈던 모씸바와 그의 아들인 다씸바를 처음 마주하게 된다. 그날의 기억은 앞으로의 만남의 예고편이 된다. 어머니가 형제를 떠나고, 아버지를 닮아 큰 덩치와 뿔을 가진 형 호다루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기억 때문에 누구보다 달리기 연습에 매진한다. 그 사이 다씸바는 어머니이지 냉혈한 외눈박이 암사자 자힐리와 함께 사냥 기술을 익힌다. 다씸바는 자힐리가 9년 만에 얻은 아들이었다. 그동안 일 년의 한두 마리씩 출산을 했지만, 하이에나 무리를 비롯하여 수사자 등 여러 포식자들의 공격으로 새끼들은 하나같이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힐리는 다씸바에게 지극정성을 쏟는다. 자힐리의 노력뿐 아니라 체취가 없이 태어난 다씸바의 특징 역시 한몫을 하게 된다. 전면에서 공격해서 상대를 잔인하게 학살하는 자힐리는 무리에서 타고난 사냥꾼이다. 그런 그녀의 잔인함은 어린 시절 형제들을 잃고 자신의 눈까지 잃고 만 피시들에게 향해있다.

 

 

 

책 속에는 음윰부와 씸바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각자 자신의 상황에서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하는 동물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 누가 나쁘고 어느 누가 착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살기 위해 사냥을 해야 하는 씸바 무리나 씸바에게 먹히는 가족들을 두고 도망 가야만 하는 음윰부 무리의 이야기조차도 이해가 된다. 이런 냉혹한 초원에서의 이야기 속에서 포식자와 피식자가 우정을 쌓는다는 내용은 자칫 현실성이 떨어지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부분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이 책은 다큐가 아닌 소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행동했던 아스카리가 포식자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또한 총 없는 전쟁터라 할 수 있는 정치판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저자 인지라 특유의 경험이 동물들을 통해 의인화되어 표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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