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디킨슨은 시가 얼음이라고 했다.
백오십 년 후 레너드 코헨은 시는 재라고 했다.
얼음이든 재든, 시는 불과 반대다.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는 한 인물에 대한 전기지만, 위인전 같은 느낌이 아니라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으로 서술된 책이다. 위인전처럼 특정 인물에 대한 찬양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혹은 그 인물이 다녔던 곳을 다니며 당시 느끼고 봤던 것을 조망하는 형태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이 책 종이로 만든 마을 역시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전기지만,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대신 에밀리 디킨슨과 이 책의 저자인 도미니크 포르티에의 삶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면서 두 여인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무슨 이야긴가 싶었다. 그중 하나가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인물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세기 미국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은 부유한 디킨슨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이 책 한 권 안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삶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지냈던 때를 보면 겨울 눈이 가득 쌓인 마당에 누워서 천사 날개를 만들며 즐겁게 지냈던 시간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 몇 년 새 에밀리는 사랑하는 형제들을 잃는다. 동생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속 인물들은 많이 닮았는데, 살아있는 형제들을 참고해서 그려져서 그런 것이었을까?
에밀리가 태어나고 살았던 애머스트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녀가 만들었던 식물표본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지금도 하버드 대학교 휴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424개의 꽃과 식물 표본 중 시작은 재스민이다. 첫 번째 등장하는 식물이 재스민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재스민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박한 식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풀어놓았다.
생전 10편의 시만을 발표했고, 사후에 드러난 많은 시까지 무려 1,755편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 시를 논하려면 당연히 에밀리 디킨슨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영향은 참 크다. 그녀의 시는 참 다양한 곳에서 등장한다. 가령 설탕 봉지나 초콜릿 봉지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녀는 늘 자연에서 머물며,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에밀리가 사랑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단지,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그녀가 남긴 시와 편지들을 통해 에밀리 디킨슨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그녀의 모습을 그려낸 도미니크 포르티에의 전기 겸 에세이집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 전반을 입체적으로 마주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종이로 만든 마을이라는 뜻이 궁금했는데, 책 중반부의 지도 이야기를 통해 책의 의미를 마주할 수 있었다. 표절을 막기 위해 가상의 마을을 만들어낸 지도. 책 속에 담긴 에밀리 디킨슨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누구도 본 사람이 없지만, 도미니크 포르티에에 의해 세상에 나온 에밀리 디킨슨의 모습은 그래서 더 색달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