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도 긴 여행
배지인 지음 / 델피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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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하는 쪽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오히려 자신이 당연한 듯 물려받은 것들에 대한

아주 작은 기득권이라도 타인과 나눠야 할 위기가 오면

더 길길이 날뛰며 저항한다.

그리고 그 저항을 정당화하는데,

이때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는 '역차별'이다.

짧고도 긴 여행은 유민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섬에서 함께 자란 친구 지호와 둘만의 추억이 깃든 이름에서 나왔겠지만, 책 안에 흐르는 유민의 삶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싶다.

유민의 아빠는 직업군인이었다. 해군인 아빠는 교회 동생인 엄마와 재회 후 결혼을 한다. 아빠를 따라 연평도로 들어간 엄마는 김일성이 죽던 해 유민을 낳았다. 원래 만삭의 엄마는 고향인 진해에 가서 유민을 낳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섬을 빠져나갈 날을 기다리던 중,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연평도는 북한과 지척인지라, 전쟁의 분위기에 따라 주민들은 방공호로 들어간다. 그리고 들어간 지 3일째 되던 날, 유민이 태어난다. 같은 군인인 아빠를 둔 지호와 유민은 늘 섬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만든다. 그리고 그곳에 짧고도 긴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학업을 위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유민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유민과 엄마가 먼저 육지로 떠나고, 아빠는 조만간 발령을 받아 합류하기로 했다. 섬을 떠나 육지로 나간다는 사실에 유민은 너무 설렌다. 하지만 아빠는 육지에 함께 갈 수 없었다. 사고로 배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의 함장이던 아빠의 죽음에 엄마는 군인가족이기에 말을 아낀다. 엄마에게 욕을 쏟아내는 병사의 어머니가 엄마를 흔들 때, 결국 참던 유민이 나선다. 그날 이후로 유민과 엄마는 서로 아프고 힘든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게 되었다. 육지의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유민은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날 이후로 무릎이 분리되는 아픔을 종종 겪는 유민은 뛸 수 없게 된다. 그마저도 긍정적으로 풀어내던 유민은 왼쪽 무릎뿐 아니라 오른쪽 무릎도 같은 상태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학에 입학한 유민은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데모에도 참여하게 되는 유민은 친구 지호가 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우연히 지호를 만난다. 유민에게 사회주의에 깊이 관여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는 지호. 아빠의 지인이라는 한 경찰로부터 역시 똑같은 말을 듣게 되는 유민은 동아리 선배가 갑자기 독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 또한 동아리 활동을 접고 취업을 하게 된다.

돈은 많이 받았지만,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과 거래처 직원의 갑질로 몸과 마음이 상한 유민은 자신의 무릎이 버텨줄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회사에 사표를 내고 프랑스로 떠나게 되는데...

다양한 이념과 여러 나라의 이야기가 책 속에 등장한다. 유민 역시 그에 따라 머무는 형태가 달라진다. 직장 생활을 접고 국제 개발을 공부하게 된 유민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등장하는데, 참 아이러니하다. 국제 개발을 통해 타인을 돕고자 마음먹고 온 학생들이 피부색으로 서로를 거부하거나 배타적으로 대하는 모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백인 우월주의가 정말 심하다.) 끼리끼리 문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한국. 프랑스. 이집트 등 다양한 나라로의 여정 속에서 유민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면서 그녀가 꿈꾸던 행복한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목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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