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 태어났다.
단지 이렇듯 웃고, 재주넘고, 하늘을 보고, 또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 태어났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금오신화 을집이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알고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설이 갑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작가는 이에 착안하여 금오신화를 모티브로 실제 인물들을 차용하여 금오신화 을집 이라는 이름의 비와 비라는 작품을 썼다.
익숙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성종 이휼을 비롯하여 사육신 중 한 명인 취금헌 박팽년, 매월당 김시습, 압구정 한명회, 월산대군 이정, 공혜왕후 한씨 그리고 박일산(박비).
전라감영에는 관노비 박비(박노비를 줄여서 박비라 부른다)가 있다. 관노비임에도 수려한 외모를 가졌기에, 자신의 사노비와 바꾸려고 하는 마님들이 많을 정도다. 하지만 박비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라도 관찰사 이극균의 수양딸인 이비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한명회의 측근이자, 분수 어사 정훼가 내려온다는 소식에 박비는 이비를 찾으러 온다. 하지만 친 딸이 아닌 터라 이씨 부인은 말썽쟁이 이비가 영 못마땅한가 보다. 어머니의 불호령에 이비는 단장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까지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간다. 사실 정훼가 전라도까지 내려온 대는 이유가 있다. 이극균의 치부를 알아오라는 한명회의 명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극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정훼는 사망한 공혜왕후를 닮은 이비를 보게 되고, 전라감영 내의 미인들을 다 불러 모으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이비는 발견할 수 없다. 별당아씨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훼는 별당아씨를 데려오라 명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비를 숨겨야 하는 이극균은 김시습을 찾는다. 김시습은 박비에게 이비를 데리고 떠나라 한다. 사실이 알려지면 이비는 물론이고 이극균의 가족들 모두가 극형에 처할 수 있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남장을 한 이비와 박비는 김시습이 알려준 주막에 머물지만, 주모의 욕심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 주모와 추노꾼 두 명까지 해치운 박비는 갑자기 사라진다. 이비에게 피하라는 말을 전하고는 말이다. 이비를 거둔 김시습은 한양으로 올라온다.
아내 공혜왕후를 잃고 울적해 하는 성종을 위해 형인 월산대군은 안견의 아들인 안소희를 불러 자신이 꾼 꿈을 들려주고는 그림을 그리라고 명한다. 그가 요청한 그림에는 죽은 공혜왕후의 얼굴이 담겨있어야 했다.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고, 죽은 사람의 얼굴을 그리라는 말에 안소희는 당황하지만, 월산대군의 명인지라 전전긍긍한다.
결국 안소희는 몽유도원도를 완성한다. 몽유도원도에 발문을 적어야 하는 상황에서 과거 안평대군이 비슷한 일로 극형에 처한 것을 아는 선비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결국 김시습이 나서기로 한다. 그리고 김시습과 함께 온 한 선비는 멋진 시를 읊지만, 그 시가 어디서 들어본 듯하다. 선비로 변장한 이비는 스승 김시습이 알려준 시를 또 틀리게 읊고, 그 시는 과거 안평대군의 유언과 닮은 사실을 아는 월산대군은 이비를 죽이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를 보고 그녀가 죽은 공혜왕후와 닮았음을 깨닫는 월산대군은 성종과 이비가 만날 자리를 주선하는데...
역시 소설 속 가장 큰 줄거리는 출생의 비밀이다. 성종과 닮은 박비. 공혜왕후와 닮은 이비. 이들 간에는 무슨 기묘한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또한 그 비밀을 풀어가며 마주치게 되는 이들의 인연의 끈은 과연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일까?
금오신화 속 환생에 대한 이야기나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 속에도 담겨있다. 실제 역사에 작가의 상상이 가미되니 또 흥미로운 한편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요 며칠 쏟아지는 비를 보며 비와 비를 읽었는데, 처음에는 하늘에 내리는 비를 의미하는 줄 알았던 제목이 두 주인공의 이름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들의 인연만큼이나 특별한 이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