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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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유령이 뭘까? 책을 읽는 내내 그 존재가 궁금했다. 우리가 아는 유령은 죽은 사람을 말하는 건데, 책 속에는 살아 있는 주인공을 향해 유령이라고 부른다. 다니던 회사가 도산하고,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속에 놓이자 나는 급하게 일자리를 찾는다. 가지고 있던 물품을 중고 앱에 올려 팔기도 하며 버텼던 시간이었다.

플라워 약국. 나이도, 성별도, 경력도 무관하고 식사까지 제공해 준다는 그곳에 문을 두드린 건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였다. 하필 면접을 보기로 한 날, 급하게 나서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면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해자의 연락처만 받고 길을 나선다. 이름처럼 동그라미에 꽃무늬가 새겨진 눈에 띄지 않는 모퉁이 동네 약국. 면접을 보는 김약사(김 국장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는)는 나(양 실장)를 보고 유령이라고 불렀다. 유령? 유령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약국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약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은 나는 괜스레 마음이 놓인다. 적어도 내 자리가 생겨서 말이다.

약국에는 김약사 외에도 남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름은 모른다. 그저 조부장이라고 부를 뿐. 하긴, 나 역시 양 실장이라고 불리지만 말이다. 처음에 낯설 디 낯선 약의 이름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점점 내가 할 수 있는 일(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어느 순간 조제실에 놓여있는 우유식빵과 딸기잼을 구매하는 것까지 내 차지가, 약사 대신 약을 조제하는 일 또한 내가 하게 된다.

매월 말일 오후가 되면 약국 앞에 장사진을 치는 제약회사 영업사원들. 하지만 김 국장을 호락호락 약 값을 내주지 않는다. 깎던가,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뿐. 그런 김 국장의 성격을 아는 영업사원들은 안면이 있는 조부장에게 이직을 권유하기도 한다. 하루도 조용히 있지 못하는 김 국장은 무척 수다스럽다. 얘기를 해도 기억 못 하면서, 자꾸 묻고 또 묻는다. 직원들의 심사를 긁어놓는 건 물론이다. 그런 김 국장임에도 수다를 멈출 때가 있다. 블랙컨슈머가 나타나면 조제실 안으로 숨어들고, 뒷일은 조부장에게 맡긴다.

나와 조부장을 보고 유령이라는 김 국장의 말에 나는 괜스레 기분이 안 좋다. 그런 내게 조부장은 양 양은 네에~라고 울고, 조부장은 글쎄요...라고 운단다. 왜냐하면 그 둘은 유령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유령의 의미가 무엇인가 답답했는데, 유령에서의 령(靈)과 영(Zero)의 동음이의어로 쓰인 것 같다. 고로 유령의 자리는 영의 자리다. 어차피 1이 되지 못한(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0.1도 0.01도 0.0000001도 모두 0일뿐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지만, 지킬 수 없는 슬픈 젊은이들을 향한 소설 영의 자리. 그래서 슬프고 씁쓸하기만 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힘없이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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