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날의 분위기부터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다 보니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을 통해 처음 만난 기억술사라는 직업이 신선하고 색다르다. 손을 얹으면 타인의 머릿속 기억을 볼 수 있다. 선오는 기억술사다. 우연히 알게 된 그의 재능은 결국 그를 므네모스 기억 치료소로 인도한다. 선오를 통해 본 우리의 기억은 커다란 도서관과 같다. 매일매일 기억이 한 권의 책으로 빼곡히 꽂혀있다. 그날의 이야기가 많다면 두꺼운 책으로,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면 동화책처럼 얇은 책으로 만들어진다. 흥미롭고 즐거웠던 기억은 표지도 다채롭지만, 평범하고 흥미 없는 기억은 무채색 표지를 가진다. 그리고 그를 찾아온 의뢰인 희주. 언제부턴가 희주의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어린 시절 쓴 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희주. 분명 며칠 전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던 기억인데, 얼마 후 일기장을 읽어보니 너무 낯선 기억이 되어버린다. 병원과 치료소의 도움을 받았지만 점점 기억이 잊힐 뿐 딱히 해결책은 없던 와중에 선오의 므네모스 기억치료소를 알게 된 희주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선오를 찾는다. 희주의 머릿속으로 들어간 선오는 엄청나게 큰 도서관 속에 얇디 얇은 무채색 책들이 가득한 희주의 기억 속에서 희주의 기억책을 먹는 이상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무엇이 먹는 책을 찢어낸 선오는 그 기억 속에 등장한 희주의 친구 은아. 태준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들과 희주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연관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은아와 태준을 찾아나서는데...
과연 기억이란 무엇인가? 옛 기억은 현재와 미래에 꼭 필요한 걸까? 책의 주인공인 희주 역시 그에 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한다. 현재의 기억은 또렷하니 그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도 사는 데 문제가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희주처럼 기억이 사라지지만 좋은 기억만 남아있는 은아의 모습은 어떤가?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면 삶이 과연 행복할까? 때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조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추억이나 경험으로 잘 포장되어(나름의 왜곡을 거쳐) 남아있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기억에 대한 책이었지만, 이상하게 유독 마음이 가는 문장이 있었다. 선오가 은아에게 해주는 이야기였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고 할 필요도 없고, 자책하지 말란 말도 아니에요.
기운이 없을 땐 푹 쉬는 거고, 자책 도 뭐, 내가 하기 싫다고 안 하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만, 너무 그런 기분 속에 갇혀 지내지 말고 그다음은 '뭘 해볼까'를 생각해 보는 거예요.
...
그냥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그 속에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떤 '의미'를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기억이 사라지는데 힘들어하는 은아와 희주에게 들려주는 선오의 이야기는 책의 내용만큼이나 내게 울림이 되었다.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찾는 것보다 꾸준히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결국 내가 갈 길을 만들어 준다는 것. 하루하루 겨우 살아간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인지라, 내게 또 다른 용기가 되는 문장이었다.
책 속에서는 선오가 기억을 정리해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머릿속 책들을 잘 정리하고 나면 머리가 한결 맑아진단다. 가끔씩 머리를 씻어내고 싶을 정도로 뒤죽박죽일 때, 내게도 선오와 므네모스 기억 치료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 맑아진 머리가 필요할 때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