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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윤순식.원당희 옮김 / (주)교학도서 / 2022년 2월
평점 :
철학은 내게 영어 같다. 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있지만, 실력이 향상(혹은 지식의 진보) 된다는 느낌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덕분에 가지고 있는 철학 입문서도 상당하고, 철학 입문 혹은 철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이 간다. 도입에는 흥미를 가지고(때론 의지를 가지고;;) 읽지만, 중반부가 넘어가면 흥미를 잃는 경우도 상당했다. 그런 면에서 색다른 맛의 철학 책을 만났다. 철학 책이 분명하지만,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저자 소개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해야 할 것 같다. 저자 R.D. 프레히트는 독일 현대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겸 독일권에서 인정받는 지성인 중 한 사람인데, 현재 독일 공영방송에서 철학 방송을 2012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내가 읽은 이 책 또한 독일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리 책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처음 책 표지에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말에, 독일인들이 철학에 관심이 아주 많거나(독일 출신 철학자가 상당수 있으니), 책이 흥미롭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자는 잘 모르겠고, 후자는 맞는 것 같다.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지만... (대학시절 한 교양수업에서 비슷한 제목으로 리포트를 쓰면서 머리카락을 상당히 뽑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말의 어원(?)은 술자리였단다. 저자의 독일어판 제목을 보고, 역자 역시 한참을 고민했다고 한다.
책 속에는 3개의 큰 주제가 담겨있다. 첫 번째 주제 속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는 제목 그대로 상당히 철학적이자 심리학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 나는 누구인가, 감정과 무의식, 기억이란 무엇인가처럼 정의를 논하기 쉽지 않은 내용들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강점은 곁들여지는 이야기가 흥미를 돋운다는 것이다. 가령 비틀스의 노래 제목이라던가, 드라마 등처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로 주위를 환기시킨다. 그런 후 그 이야기에서 파생되는 철학적 속내를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 등을 통해 다시 한번 서술한다. 책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철학을 이끌어내기 위해 책 속에 담고 있는 주제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경험담 뿐 아니라 매체나 영화, 작품뿐 아니라 과학기술이나 외국의 사건들, 국제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덕분에 철학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각 분야의 전문서를 읽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두 번째 주제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서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인간의 행동에 대한 철학적 정의가 담겨있다. 예전에 읽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각 소 주제들이 등장한다. 남은 돕는 행위, 도덕, 선한 행위에 대한 보답, 살인과 낙태, 안락사와 복제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까지 현대 사회에서 민감한 주제들에 대해 서술한다. 사실 이런 질문을 우리 또한 받고, 하지만 쉽게 답을 내기 어렵기도 하다. 때론 포괄적이고, 때론 지극히 윤리적이고 민감하다. 그래서 또한 흥미롭기도 했다.
마지막 내가 희망해도 좋은 일은 무엇인가라는 주제 속에는 우리 삶을 파고드는 문제들(사랑과 행복, 신, 재산과 삶의 의미 등)에 대한 사색과 정의가 담겨있다. 개인적으로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첫 장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언급하며 등장한 니체에서부터 인생의 의미에 대한 34장의 이야기 속 매트릭스와 플라톤의 이야기까지 각 주제별로 다양한 철학자와 이야기 속에서 한참을 빠져있었던 것 같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이유가, 원하는 철학 입문서가 없어서라고 했는데 책을 읽으며 그 뜻이 이해가 갔다. 또한 그의 머릿속에는 철학으로 가득 차있겠다는 생각을 나 또한 해봤다. 어떤 주제를 눌러도 마치 자판기처럼 그에 대한 철학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다양한 주제를 심도 있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 뜻깊은 책이었다.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주야장천 철학의 역사만 읊어대는 책이 부담스럽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