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좋아하지만,
현대사에 가까워질수록 생각보다 지식이 미천한 것 같다. 핑계를 대자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내 한국사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진도를 빼기 어려웠던
것 같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시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뿌연 안개처럼 모든 것이 흐려진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인 건청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책을 읽으며 건청궁이 경복궁 안에 있고, 고종이 지었으며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조선의 어떤 국모보다 선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황후다. 그녀의 말로가 비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명성황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녀의 시각에서 기록된 이야기이기에 마치
난중일기나 한중록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설이다. 읽다 보면 실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명성황후의 시각에서 쓰였기에 한참을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건청궁 일기의 시작은
이렇다. 일본인이자 한국 통감 직속 특임 학예관 호소카와 이치로에게 소네 신스케가 자신이 발견한 두 구의 여인에 사체에 대해 이야기를 전한다.
두 구 중 한구의 시신이 고종의 비였던 명성황후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건물 해체작업을 하던 중 땅이 꺼지는 바람에 지하통로를 발견하게
되었고, 지하통로 안쪽에서 두 구의 사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왕비의 복장은 아니지만, 두 구 중 한구의 시신에서 책이 발견되었고, 그 책을
토대로 짐작건대 그녀는 명성황후라는 것이다.
소설은 명성황후의
시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고, 이치로가 발견한 시신에 대해 궁금증을 쌓아가며 명성황후의 죽음과 연관된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그녀에 대해 접근해나간다. 사실 누구에게나 명성황후에 대한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드라마 속 명성황후는 당차고 똑똑하지만
상당히 강한 그래서 조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만난 그녀는 그동안의 우리가 알던 명성황후와는
달랐다. 자식을 앞세운 상처, 어머니와 오빠, 조카를 한순간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떠난 길에서의
이야기, 무당인 두옥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자매와 다름없는 몸종인 옥련과의 이야기 등 냉혈한이 아닌 인간이자 어머니라 여인이었던 명성황후의
이야기가 그녀의 목소리로 담겨있다. 덕분에 또 다른 이미지의 그녀를 만날 수 있었고, 그녀의 선택이 한편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물론 책 속의
명성황후 역시 똑 부러지고, 왕비임에도 왕에게 조언을 넘어선 직언을 할 수 있는 여인인 것은 확실했다.
그동안 만난 명성황후가
강한 이미지만 있었다면, 책 속 명성황후는 좀 더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서 신선했다. 역사의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작한 소설이지만 그녀에
대한 편견이 조금이나마 사라진 것 같아서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