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는 문장 속으로 뛰어들어 현실의 문을 닫았다.

문을 닫으면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조용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했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제목이 무슨 뜻인지 내심 궁금했다. 기린과 타자기라...? 기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목이 긴 동물이었기에 더더욱 기린과 타자기는 매치가 안 되었다. 물론 생각보다 많은 분량을 읽기 전에 제목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기린아(麒麟兒)라는 단어가 있다.  슬기와 재주가 남달리 총명한 젊은이를 일컫는 말인 이 단어는 엄마인 서영이 단편소설 공모전에서 당선되었을 당시 친구이자 서영에게 타자기를 선물한 우탁이 서영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첫 장면부터 뭔가 특별하다. 사고가 난 듯한 장면 속으로 갑자기 한 여자가 들어온다. 그녀는 어린이와 여성, 노인을 먼저 구하고 그 남자를 구한다. 남자는 돈이 될 것 같아서 사고 장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남자를 구한다.

보청기의 힘을 빌려서라도 듣고

남들에게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삶으로부터의 탈출.

로그아웃하면 그 모든 노력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일종의 포기였지만 묘하게도 포기하는 순간 오히려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멋진 가정이 있다. 대형교회 목사인 할아버지, 모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던 할머니, 목사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조용조용한 엄마와 쌍둥이 남매.

하지만 실제로 이 가정을 들여다보면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망가져있다. 시험을 앞두고 새벽 기도를 갔다가 목사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결국 결혼을 하게 된 엄마는 결혼 첫날부터 시집 식구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쌍둥이 남매를 출산하지만, 딸은 청각장애를 앓는 장애를 가졌다. 할머니는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지하 와인창고에 며느리 서영과 손녀 지하, 손자 지민을 가둔다. 그리고 CCTV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본다.

서영은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서영의 친정 때문이었다. 가난한 친정식구들은 서영에게 빌붙어 부자 시댁을 도움을 받고자 한다. 서영이 가정폭력을 이야기했지만, 서영의 친정식구들은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면서 서영의 이혼을 막을 뿐이다. 그런 삶 속에서 결국 지하는 가출을 한다. 

책 속에는 두 공간이 등장한다. 실제인 공간과 지하의 백일몽 속 공간 말이다. 처음 드러나는 이야기 속에서 지하는 공간이동을 하는 초능력자 같았다. 그런 능력을 사람을 구하는 곳에도 사용했지만, 은행을 털거나, 음식을 무단 취식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두 공간을 넘나들며 그녀는 자신의 능력과 생각 그리고 꿈을 키워나간다. 사실 어떤 게 실제 이야긴가 상당한 시간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책 속 이야기를 따라 나가다 보니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

상상의 세계가 아무리 달콤해도 현실의 내가 없다면, 상상 속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400페이지가 넘는 내용을 순식간에 읽어버릴 정도로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실제 이야기와 상상 속  이야기가 교차하며 등장하기에 어떤 게 실제인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픔 속에서 지하가 독립하고 스스로 자신의 앞을 개척해가는 이야기도, 서영 또한 늦었지만 자신의 길을 다시 찾는 이야기도 좋았다. 공간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지하의 소설 이야기도 좋았고, 완전 사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의 복수를 일궈내는 이야기도 좋았다. 청각장애를 가진 지하를 향한 세상의 편견들 속에서 끝까지 지하 편을 들어준 예지 모녀와 서영의 친구 우탁 또 기억에 남는다. 6년 후 다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 지하와 서영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하지만, 책 속에는 등장하지 않기에 나 또한 내 백일몽 속에서 그녀들의 만남을 그려봐야겠다. 세상의 모든 지하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출산의 고통과 산후우울증을 겪어낸 많은 엄마들 또한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