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이 나타나서 비둘기를 겨냥했을 때 개미가 사냥꾼의 발등을 문 것이
은혜를 갚으려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과란 돌고 도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서로 주고받는다는 점이다.
우화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이솝이다. 근데, 이솝우화가 상당히 오랜 옛날인 기원전 6세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당히 놀란 기억이 있다. 그 옛날부터 풍자와 우화가 등장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솝 우화는 누구가 익숙하지만, 라퐁텐 우화는 어떨까?
17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동화 작가인 장 드 라 퐁텐은 이솝 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좀 더 깊은 풍자적 우화를 발표한다. 이 책은 라 퐁텐 우화를 기반으로 19세기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를 담아 저자 다니구치 에리야가 현대적 성격으로 재 탄생시켰다. 3개의 파트로 나뉘어 각 주제에 맞는 우화들을 만날 수 있다. 읽다 보면 익숙한 우화들도 있고,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만나기도 한다. 라퐁텐이 쓴 우화를 재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이야기 말미에 저자의 말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화만 읽으면 그저 옛날이야기 혹은 그냥 머릿속에 떠도는 교훈 정도로 마칠 수 있지만, 저자에 의해 다시 해설된 부분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한 번 더 교훈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동물들을 빗대었다고는 하지만 아이와 함께 읽기엔 조심스러운 이야기들도 있다. 당연 우화 속에는 세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 담긴 뜻을 찾아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여러 편의 이야기 중에 특히 와닿는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기억나는 한편은 독수리가 되고자 한 까마귀라는 제목의 우화였다. 독수리가 양을 잡아가는 걸 본 까마귀는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맛본 양고기가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있는 터라, 까마귀는 기왕이면 더 크고 튼실한 양을 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제는 자신이 독수리가 아닌 까마귀라는 것이었다. 독수리처럼 큰 날개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까마귀는 독수리가 했듯 가장 큰 양의 등허리를 움켜잡는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설상가상 까마귀 발톱이 양털에 엉키게 되고, 양들이 놀라 날뛰는 바람의 우리의 욕심 많고 분수를 모르는 까마귀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또 다른 한 편은 태산의 해산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상당히 짧은 이야기지만, 안에 담긴 교훈은 무시할 수 없다.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태산이 해산을 한다. 사람들은 큰 소리에 기대를 품고 태산의 주위로 모여든다. 엄청난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기대 말이다. 하지만 태산이 낳은 것은 작은 쥐 한 마리일 뿐...
태산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망하고 만다.
과연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앞장만 읽었을 때는, 태산이 엄살을 부렸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큰 산이 큰 신음소리와 고통 속에서 낳은 게 겨우 작은 쥐 한 마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생각한 교훈은 달랐다. 아무리 작은 생명일지라도 세상에 태어날 때는 누군가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대놓고 교훈을 드러내지 않지만, 작품 속에 지혜를 때론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는 우화만의 장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