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위험한 철학이 도사리고 있다. 어째서 그것들이 위험하다는 말인가? 그것들은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도 독단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에 상관없이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것의 산물인 내적 정합성, 그것의 원리가 가진 외관상의 합당성, 개개인을 편견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약속, 과학의 성공, 이 모든 것은 합리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생각되었고, 합리주의에 대하여 거의 초인간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167쪽
포퍼는 이들 요소를 충분히 사용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자신만의 마비성이 강한 요인을 덧붙였다. 바로 단순성이다. 자신의 원리를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정합성을 갖춘 철학이 도대체 왜 잘못인가? 그것은 철학이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로, 그것은 과학철학의 경우에서 보면 과학적 실천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철학은 그 자체만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인도해야 하고 변화를 위한 청사진도 제공해야 한다. 포퍼는 그러한 안내나 지도는 단순하고 정합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하고, 그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는 그는 그 이전의 철학자 크라프트와 라이헨바흐, 허셜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실천과 과학적 탁월성의 기준 사이를 구분하고, 인식론은 오직 후자만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과학의 세계와 일반적인 지식의 세계)가 그 지도에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 -167쪽
한 동안 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전통적인 이론들이 ‘인식적으로는 무의미함‘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조롱하는 일은 매우 재미있었다. 반증 가능성이라는 마법의 지팡이를 높이 쳐들어 존중할 만한 과학이론을 비판하는 일은 더욱 신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중요하지만 결코 명백하지 않은 가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합리적‘ 기준이,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고, 받아들이며, 칭송하고 있는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유동성 있고, 풍요롭고, 고무적이며, 기술적으로 효과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 가정은 틀린 것이었다. 반증 가능성의 원리에 따라 이미 결정된 대로만 실천하고 어떤 핑계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과학을 송두리째 없애버릴 것이다. -168쪽
지금에야 나는 이 ‘아나키즘‘이라는 말 속에 수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확신한다. 과학의 세계를 포함해서 세계는 복잡하고 분산된 실제이기 때문에, 이론과 단순한 규칙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심지어 나는 학생으로서 철학자들의 지적인 종양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적 성취에 대한 토론이 ‘명료화하려는‘ 시도로 방해받을 때, 나는 인내심을 잃어버렸다. 거기서 명료화는 어떤 파격 논리의 형태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신들은 중세 학자와 닮았다", "그들은 어떤 문장이 라틴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라며 나는 반대했다. 내 의심은 논리에 대한 조회가 명료화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과학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이용되면서 더 커졌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원리와 실재하는 세계 사이의 거리가 분명해질수록 "우리는 논리적 논점을 세우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249쪽
한편 실재reality의 문제는 항상 나를 특별히 매혹하는 힘이 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사건 이면의 놀라운 것을 찾는가? 왜 그들은 이 놀라움이 합쳐져서 전체 세계를 구성한다고 믿는가? 그리고 가장 희한한 일이지만 왜 그들은 이 감추어진 세계가 그들이 출발하는 세계보다 더 견고하고 더 믿을 만하며 더 실제적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놀라운 일에 대한 추구는 당연한 것이고 결국 처음의 것과 나중의 것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왜 모든 현상이 우리를 기만하며(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대로) "진리는 심연 속에 감춰져 있다"고 가정하는가?-282쪽
많은 사람은 자신과 그 자신의 환경 사이에 거리를 둔다. 하나의 전체로서 서양문명은 인간을 ‘개인‘으로 변화시킨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나로 남고 너는 너로 남는다. 방탄유리와 같이 서로 교류하는 당사자들이 각기 자신만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감정과 행동에 한계를 부여한다.-292쪽
나는 실재에 관한 책을 한 권 쓰겠다고 그라지아에게 약속한 적이 있다. 그것은 매우 천천히 모양새를 갖추어갔다. 책의 제목은 잠정적으로 <풍요로움의 정복Conquest of Abundance>이다. 그 책은 전문가들과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풍요로움을 어떻게 줄여가는지, 또 그들의 행동 결과는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주로 추상(특히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개념)의 역할과 그것이 수반하는 안정성과 ‘객관성‘에 관한 연구다. 그것은 그러한 추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통상적인 말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에 따라 어떻게 뒷받침되는지, 또 그러한 추상이 논증과(또는) 실제적인 압력의 결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다룬다. -306쪽
내가 <방법에의 도전>을 쓰게 된 동기는 철학적인 우매화나 ‘진리‘, ‘실재‘, ‘객관성‘과 같은 추상적 개념의 횡포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비전과 이 세계 가운데 존재하는 방식을 협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민주‘, ‘전통‘, ‘상대적 진리‘ 등과 같은 정도의 엄밀성을 가진 개념을 도입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려는 충동, 그것도 단순하거나 이야기 속에서가 아니라 ‘체계적 설명‘이라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려는 충동이 너무 강했다. ...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한 스타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깊이가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동료 시민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하는 모든 작가에게 철학에서 한 걸음 물러나라고 강권한다. 혹은 적어도 남을 우매하게 만드는 데리다와 같은 사람에게 겁먹고 영향을 받는 일을 중단하고, 그 대신에 쇼펜하우어나 칸트의 유명한 글을 읽으라고 권한다.-30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