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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의 사막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든 직장인의 얘기인지도...
사관학교를 마치고 장교로 임관한 조반니 드로고는 기대와 달리 사막을 마주한 산속 국경 요새에 배치된다. 당장 떠나고 싶었지만, 눈치를 보느라 넉 달만 있다가 떠나기로 한다. 오지인 국경 요새에는 병사들이 나름 절도 있고 기강이 잘 서 있는 것 같지만 오지 않을 적을 기다리느라 평생을 보낸 장교들이 여럿 있다. 적이 오는 날이 이들이 기다리는 날이다. 군인으로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날, 모든 기다림이 보상 받는 날. 드로고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들에게 동화된다. 넉 달은 이 년이 되고, 이 년은 사 년, 그리고 십오 년이 되며 세월은 흘러간다. 적은 쳐들어올 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만 한다. 결국 요새에서의 삶은 평생이 되며 이제 은퇴를 해야 하는 날이 다가온다.
좋은 날이 오리라 기대하며 사회와 동떨어져 살면서 가정도 꾸리지 못하는 드로고의 삶은, 좋은 날이 오리라 기대하며 시간과 젊음을 직장에 바치는 직장인의 삶에 대한 은유로 내게 다가왔다. 직업이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얘기해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사는지가 더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변에 어떠한 친구가 있고 어떠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가. 가족과는 어떠한가. 어찌 보면 직장인은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을 직장에 갈아 넣는 삶. 주말에 잠깐 쉬고 다시 일주일. 그렇게 일 년, 이 년, 십 년... 사실 내게도 많은 날이 남아 있진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소설(이탈리아어 원제 <Il deserto dei Tartari>)은 1940년에 발표됐다. 제목에 나오는 '타타르인'은 얼굴도 모르는 북쪽의 적을 이르는 일반명사로 쓰인다. 우리말의 '오랑캐'와 비슷한 의미이다. 저자인 디노 부차티Dino Buzzati는 1906년 생으로,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소설 속 끝없는 기다림을 읽으며 내게도 카프카의 <성>을 읽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다음은 책 속 몇 구절:
그것이 멀리 있느냐고? 아니, 저 아래 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고, 저 푸른 언덕을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아니, 어쩌다 벌써 도착한 것은 아닐까? 이 나무들과 초원, 이 하얀 집이 우리가 찾고 있던 게 아닐까? 잠시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거기에 머물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런 말이 들려올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더 멀리 있으니 괴로워 말고 다시 길을 떠나라.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의 나날들은 지나갈 것이다. 그제야 어떤 깨달음이 일어, 그는 못 미더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이어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발소리를 느끼게 되리라. 자기보다 일찍 몽상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먼저 도착하기 위해 그를 따라잡으려는 사람들이다. 그는 삶을 맹렬하게 재는 시간의 고동소리 또한 듣게 될 것이다. 이제 창가에는 웃는 얼굴 대신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만일 그가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지평선을 가리키겠지만 어떤 선량함이나 기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친구들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지쳐서 뒤에 남는다. 또 누군가는 일찌감치 앞질러 가는데, 그는 고작 지평선에 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61~6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