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에 자성이 있다면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이 일체는 항상 그대로 있게 된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라든가 눈앞에 펼쳐지는 생멸 현상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불교의 기본 교리인 무상無常도 부정되며, 중생은 아무리 수행을 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과오도 범한다. 자성인 고苦와 번뇌를 무슨 수로 없앨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용수는 『중론』 제24장 제14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이 타당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타당하다. 공이 타당하지 않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타당하지 않다." (180~181 페이지)
자연의 변화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인데, 논리적으로 볼 때 꼭 그렇지 않다는 생각.
하지만 이 색즉시공의 길 끝에서 공즉시색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한순간에 저절로 이루어진다. 색즉시공은 대사일번大死一番, 즉 한번 내가 크게 죽는 길이다. 본인이 자진해서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철저히 놓아버리는 것이며,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죽는 것에 의해 도리어 모든 것이 참된 진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을 선에서는 절후소생絶後蘇生이라고 한다. 공즉시생은 절후소생에 해당한다.
중생인 우리는 색즉시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공즉시색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과거의 내가 죽지 않고는 만물은 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나지 못한다. (183 페이지)
종교는 모두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도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야(born again) 한다고 말한다. 배경이 되는 철학은 다르지만, 겉모습의 결론은 같다. 하지만 뉘앙스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