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856쪽의 두꺼운 책을 내달려 읽었다.

읽으면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어려워서 중간에 막히거나 헤매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맛있는 곶감을 빼먹듯 야금야금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만난 충격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난 이 결혼 반댈세~!'의 심정으로 '난 이 결말은 절대 반대다~!'라고 하고 싶지만,

책은 내가 쓰는게 아니라, 박지리 님의 그것이니까 말이다.

단편 소설보다 이렇게 두께감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이다.

 

 

 

 

 

 



옛날 옛적에 읽었던 '마리샤 페슬'의 '블루의 불행학 특강'도 연상되고,

이윤기 님이 번역한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도 생각난다.

적당히 겹쳐진다.

 

가볍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열여섯 살 아이들의 얘기여서 그런지,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더 마스터'란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고,

최백호 님이 부른 '아씨'라는 노래를 듣다가 그 어설픔의 원인을 짐작하게 되었다.

곰삭은 느낌, 잘 울궈낸 곰국 같은 깊은 맛이 들지 않았다.

'마리샤 페슬'과 '도나 타트'도 그 연장선 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 거울 속에 다윈과 자신의 모습이 함께 비치는 것을 본 니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란 때때로 이 거울과 같아서 현재 안에 늘 과거를 품고 있는걸까. (25쪽)

이 문장은 문장 자체만으로도 아포리즘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만, 복선을 담고 있는 문장이다.

이런 복선이 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창으로 쏟아지는 빛이 방 안 사물에 닿아 바닥 여기저기에 기하학적인 그림자가 생겨났다. 가장 밝은 빛 옆에서 가장 어두운 그늘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빛과 어둠으로 고약하게 조각난 세계 같았다.(27~28쪽)

이런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다윈은 옛 친구의 죽음에 아버지가 고수하는 엄격함이 좋았다. 죽음을 존중한다는 건 그만큼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삶을 존중한다는 건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였다.(30쪽)

극과 극은 통한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죽음과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속성까지 완전 일치하지는 않는다.

엄격함은 상대적으로 느슨함이어서,

자신에게 엄격함을 적용하는 순간 타인에게는 느슨함이 자동 적용된다.

자신에게 느슨한 사람이 타인에게 엄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이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서,

이 세상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태어나는 삶이 주어지듯이 말이다.

"다윈 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었다. ㆍㆍㆍㆍㆍㆍ다윈은 뜻밖의 질문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있다고 생각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조건을 붙였다.

"하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진 않을 거야."

루미는 호기심이 일어 물었다.

"그럼 어떤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사랑?"

"응.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영혼 같은 건 아무 쓸모도 없잖아. 쓸모없는 건 퇴화하는 게 진화의 법칙이겠지."(47쪽)

이런 진화의 법칙, 즉 적자생존의 법칙 자체가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아래 니스가 쓴 축사, 써놓고 보니 아들 다윈영을 위한 헌사 같았다던 이 구절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ㆍㆍㆍㆍㆍㆍ정상이 아닌 산등성이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만개하지 않은 꽃은 그대로 완전합니다.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새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여러분이 남몰래 알 수 없는 불안과 시련을 겪고 있다 해도 역시 그대로 완전합니다. 매 순간, 여러분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완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720쪽)

이 구절은 저 위 다윈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와는 상반된다.

어쩌면 다윈의 아버지 니스 본인도 헌사 속의 삶을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회한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린 다윈은 모르고, 또 인정하려 들지 않을 지 모르지만.

 

훌륭한 부모는 어느 훌륭한 종교보다도 낫다. 그러나 훌륭한 종교가 드물듯 훌륭한 부모도 드물다.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그분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었다. 나에게 신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110쪽)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겠지만,

이 책의 제목대로라면 훌륭한 종교나 선 뿐만 아니라, 악의 근원 또한 대물림된다고 할 수 있을텐데,

다소 억지스럽고 논리적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필요한게 종교나 부모가 아닐까 싶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좀 다른 얘기일수도 있는데,

다시, '최백호'님의 '아씨'라는 노래로 돌아가,

'낭만에 대하여'란 곡 정도로 접했던 분인데,

'아씨'라는 노래는 완전 죽음이었다.

처연한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저 손을 놀리는 제스츄어는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살짝 다가가 지그시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나눌 수 있지 싶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이 먹는 것이, 죽음에 한 발자국 가까워지는 것이 좋아졌다.

 

선이라던가, 악이라던가,

인간의 본질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무색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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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1-20 14:27   좋아요 1 | URL
인용해주신 인간의 영혼에 대한 대화가 인상깊네요.
전 저번주에 뇌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인간-뇌-의식-영혼에 대해서 생각해왔던 참이라서요.

그 다음 문단도 맘에 와 닿구요.
결국 이 자체로서 완전한 인간이라면 우리는 현재의 삶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죽음마저 그러한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ㅎㅎㅎㅎ
궁금증을 양철나무꾼님 방에 놓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7-11-20 14:53   좋아요 0 | URL
그쵸?
다만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듯하여 님의 궁금증을 해소해 드릴 수 없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박지리 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한권으로 그의 전작을 찾아 읽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 분 젊은 아니 어린 나이에 사망하신듯 합니다.
사계절 편집자 분의 절절한 연서를 본듯도 하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