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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며칠전이었다.
허리가 아프다는 30대 남자에게 치료 후 스트레칭을 가르쳐주는데,
허리를 젖히는 동작은 잘 따라하다가 구부리는 동작에서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의사가 나와서 젖히는 동작은 하되, 구부리는 동작은 안 좋으니 하지말라고 했다는 거다.
그것은 물건을 들다가 과격한 운동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을 경우, 급성기 때의 얘기라고, 기전을 알아듣게 설명해줬는데도 불구하고 망설이길래, 그럼 그 의사한테 가지 왜 나한테 왔냐고 째려봐 줬다.
또 한명, 중부지방이 유독 발달하여 선채론 자기 발목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30대 여자가 발목을 겹질려서 왔다.
치료 후 많이 움직이지 말고 집에 가서 쉬라며 보냈더니, 다음날 발목이 퉁퉁 부어서 왔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운동부족이라고 해서, 그 다리를 질질 끌고 개천길을 두어시간 걸었단다.
보통 '권리'라고 하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힘'을 얘기하지만, 그 권리에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가 전제되어 있다.
권리나 의무라고 하니까 법적인 구속력을 가질 것 같지만,
'마땅히 해야 하는'과 '마땅히 누릴 수 있는'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도덕적 당위성'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 '공부할 권리'도 마찬가지이다.
책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를 보면,
언젠가 어릴 때 살던 동네를 걷다가 20년 만에 이웃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주머니는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너는 우리 동네의 희망이야. 우리 아들은 그렇게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내가 형편이 안 돼서 못 시켰거든. 너는 축복받은 사람이니까 그걸 잊지 말고 더 열심히 공부해."하셨습니다. 덕담이기도 하고 넋두리기도 한 그 말씀을 들으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계속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계속 배움의 길 가르침의 길 위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 아픈 깨달음으로 먹먹해지던 순간이었지요.
이 책에는 제가 지난 10여 년 동안 시간표도 선생님도 없는 나만의 작은 마음의 학교에서 스스로 배우고 익힌 배움의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ㆍㆍㆍㆍㆍㆍ (348쪽)
라는 구절이 나온다.
20년 만에 만난 이웃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그 '공부'라는 것을,
이 책에서 저자 정여울은 자기 편할대로 해석하고 적용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차치하고,
권리라는건 법적 구속력이나 도덕적 당위성보다는,
의무를 전제로 해야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심사숙고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우리 아들은 그렇게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내가 형편이 안 돼서 못 시켰거든."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씀 때문이었다.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하고 또 본인이 계속 하고 싶어하는 개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부를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전제되어야 하는게 당연지사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품위있는 삶'을 위해 '인문학'적인 그것이 필요한 것도 맞고,
자신의 전공과 직업을 연결시켜, 책읽기와 글쓰기, 가르침을 전제로 한 배움을 '공부'라고 하는 저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의 제목이 '공부할 권리'로 정해진 그 순간,
저자가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품위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을 지향하기보다는,
그동안의 주입식 교육관에 순응하는 '문제풀이의 기술'인 그 공부인듯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힘들다.
'품위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이라는 소제목은 차치하고라도,
공부의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세히 풀어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곰곰이 생각하고, 삶에 적용 또는 실천하기'...정도로 바꾸는게 낫겠다.
'공부'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숨쉴 권리만큼이나 소중한 자존감의 근거...라지만,
말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나고 경기를 일으키는 나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공부나 인문학 따위 거창한 이름으로 명명하지 않더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따로 공부하거나 책 읽을 시간을 낼 순 없지만,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하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게 공부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인문학이 아닌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제한하거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되니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유롭게 사고하기 위한 과정쯤으로 생각하는게 좋겠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어서 어울려 사는 존재이다.
인간이 홀로 외롭게 늙어갈 수 있는 존재라면 인문학 따위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개별적인 인간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더불어, 어울려,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학문으로 보고 접근하는게 맞겠다.
며칠전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정, 나의 종교'를 읽고, 이런 느낌을 올렸었다.
친구와 다퉜다.
다퉜다고 하여, 애들처럼 티격태격한건 아니고,
'우정, 나의 종교'를 읽으며,
나의 우정이란 것의 무게가 너무나 하찮고 가벼움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허허로움을 아는지,
사실은 자신도 가짜라고 하며, 자신도 부질없다고 하는데... 서러움이 복받쳤다.
내 글을 읽은 친구는 아직 애기라며 웃었다.
서러움이 복받칠 정도로 사랑받고 싶은 맘이 큰 거라며,
어린 시절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거라고 하는데, 수긍할 수 없어 또 툴툴거렸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오히려 늘 환영받는 아이로 자란 사람들이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어쩔 줄 모릅니다. 고통에 대한 예방주사가 접종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저는 인생의 멧집을 키우고 고통의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동화의 힘이라고 믿습니다.(26쪽)
라고 한다.
이 책을 읽은 다음이었다면 '동화의 힘'을 들먹이으면서 막강 대응을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ㅋ~.
그러고 보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얘기하고 있는 '공부할 권리'라는 것은,
저자가 문학평론가이면서 작가라는것 때문에 '공부'에 방점을 찍으려고 해서 그렇지,
'인간답게 살 권리'정도로 바꾸면 무난할 것 같고,
이 책의 에필로그에 가면 그마저도,
자격증이나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미치게 좋았다며, 공부가 가장 소중한 마음챙김의 기술이었다(345쪽)
며 마음챙김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비슷한 감정처럼 보이는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외로움은 혼자 있을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입니다.(104쪽)
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명쾌하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 만의 고독과 마주하는 법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심리학자 융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시간, 무의식의 상처를 대변하는 시간, 이어서이다.
차마 인정하기 싫은 습관과 아픈 상처, 숨기고 싶은 과거들이 나자신의 일부임을 긍정하는 데서 자기치유는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고독할 수 있는 자유라고 표현되고 있으며,
우리의 잠재된 창조성이 만개하는 시간이며 잃어버린 가능성이 아름다운 날개를 펴는 시간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런 류의 책과 영화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나이들면 누구에게나 이런 외로움이나 고독이 찾아오기 마련이니,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난감해하지 말고 잘 구별하고 기꺼이 대비하라고 일러주는듯 하다.
약한 것들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제멋대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힘을 비축할 줄 압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비축해 둔 힘이 진정으로 필요할 때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나눠 줍니다. 그 마음 또한 '나는 약하다. 그러므로 힘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겸허함에서 비롯되지요. 계속 강하고 대단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현대인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요.
물론 나약함이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약한 척하여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것 또한 약한 자들이 '약함의 권력'을 행사하는 편법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섣불리 만용을 부리지 않지요. 스스로의 소중한 힘을 아끼고 다듬어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합니다. 타인의 아픔에 위로가 필요할 때,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원할 때 쓸 줄 아는 것이지요. 때로 우리의 진정한 무기는 타인을 통제하는 '강인함'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나약함'입니다.(148~149쪽)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이 책이 멋진 것은 위 구절 때문이다.
약자와 강자, 부족한 인간과 완벽한 신과의 대비를 통하여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힘의 세기에 따라 어느 쪽이 좋고 나쁘거나, 낫고 부족하거나, 잘하고 못하거나, 가 판가름 나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전능해서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신들과는 달리,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때론 혼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비워낼 줄 알아야 하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신보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이 책을 막 읽기 시작하였을땐, 좁은 의미의 '공부'만을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읽기의 확장에서의 쓰기, 그 확장에서의 곰곰이 생각하기,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포함하는 삶에 적용 또는 실천'까지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접근법을 '공부'라고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동안의 편견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지는 않았었다.
낯선 이들 앞에서 강의를 할때마다 아직도 저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읽은 대해 수줍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낯선 이들의 눈빛에 조금씩 온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각자 다른 공간에서 똑같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됩니다. 가끔 책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고 몸서리를 치곤 합니다. 책없는 세상은 곧 낯선 사람의 운명을 내 삶 속으로 초대할 기회를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세월이 아닐까요. 독서는 단지 지식을 흡수하는 두뇌운동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몸의 실천이고, 새로운 인연의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제 책을 '사는(buy)' 것을 넘어 책의 내용을 '살아 내는(live)'실천이 필요합니다.(322쪽)
그러다가 '각자 다른 공간에서 똑같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되는 걸,
알라딘 서재 , 이곳에서 문득문득 경험하게 됐었고,
책에 관해서 까다롭고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와 비슷한 취향들을 만나는 순간,
멀리 있던 우주가, 우주의 별들과 햇살이 내게로 달려오는 느낌이랄까?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더불어, 대교약졸이라는 말 따위랑은 어울리지도 않게,
그동안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을 읽다보면 너무 수사가 화려해서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어디까지가 문장의 주요성분이고 어디까지가 수식어들인지 모르겠었다.
이제 그런 수식어들을 하나 하나 차근차근 지워내고 나니까,
문장의 주성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 골자가 보이고,
그러고 나니, 고전이 얘기하려는 바가 뭔지를 알겠고,
그러니 본질이 보인다.
고전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다.
수식어로 꾸며 화려하게 치장하고 살지,
수식어를 제외하고 주성분만으로 간결하게 살지,
정답은 없다, 선택은 각자의몫이다.
알듯 모를 듯, 나도 잘 모르겠는 내 마음 대변하듯, 이성복 님은 시 '금기'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詩. 이성복 '금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