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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평점 :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인이 될때까지 타지 생활을 해보지 못했던 터라,
중ㆍ고등 학생 시절, 방학이고 명절 때면 시골에 가는 아이들이 마냥 부러웠었다.
말하자면 시골에 어떤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었던 셈인데,
이런 환상은 시골 출신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처음 인사를 가던 날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고소한 기름냄새 폴폴 풍기며 지지고 볶는 것이 잔치 음식이나 손님 맞이 음식의 정석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을 깨고,
마을 어귀까지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왔다.
난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난 개성 지방 할머니 밑에서 자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입이 호사를 누리고 살았지만, 비린내 나는 생선류는 목록에 없었다.
정월이면 조랭이 떡국에, 손수 빚은 만두, 보쌈김치, 동치미를 얹은 상차림으로 시작으로 하여,
봄이면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곱게 화전을 부쳐 주셨고,
들판에 쑥이 지천으로 깔리면 쑥개떡을 납작납작하게 빚어 주셨다.
여름이면 초계탕으로 몸보신을 했고,
가을이면 늙은호박 속을 박박 긁어내고 호박죽을 쑤어주셨으며, 저며 볕에 말렸다가 호박고지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동지날에는 팥죽과 팥떡, 식혜를 챙겼고,
울거나 떼쓰면 내어주시던 얼음 박힌 수정과와 조청엿의 맛도 잊을 수 없다.
헌데, 시어머니의 음식은 비린내로 기선을 제압했다.
상차림의 정성은 생선의 양과 가지 수에 비례했으며,
바다에 가까웠지만, 농촌지역의 특성 상 항상 일손이 달리다보니,
음식이나 담긴 모양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고, 손이 덜 가는 조리법을 선호하셨다.
덕분에 각종 장과 젓갈, 짱아찌 등 염장음식의 천국이었다.
시어머니는 종갓집 맏며느리답게 음식 인심이 후하셨다.
모든 음식을 넉넉하게 하셨는데, 그중 최고는 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분이 드실땐 안 그러신다는데,
끼니 마다 밥을 넉넉하게 하시고도 남아, 누룽지를 눌려 숭늉을 만드시면서도,
먹다 남은 찬밥을 꼭 당신이 드시는 거다.
몇 번은 뺏어 먹어도 봤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싶었던 난, 어느날 남은 찬밥을 새로 한 밥에 섞어 버렸다.
"어머니,우리 다같이 조금씩 나눠 먹어요."
찬밥에 물 말아 드시던 것을 대가족 사회, 가부장 제도 하에서 여자들의 지난한 삶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맘 아파 했었던 것 같다.
춘분도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봄노래 꽃타령을 할 일만 남았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324/pimg_7451441771389246.jpg)
돌을 소화시킬 나이는 한참 지났고,
하여 밥이 한번씩 맛이 없을 법도 하건만,
먹고 나서도 식곤증에 시달린다며 병든 닭처럼 졸고 앉아 있어야 될텐데,
난 성능 좋은 스프링마냥 통통거린다.
오히려, 환자로 오시는 어르신들이 봄을 타시는지 영 밥맛이 없으시단다.
내가 간식으로 갖다놓는 과자 따위는 하나씩 둘씩 잘 주워 드시면서,
밥은 '맛대가리'가 없으시다면서 역정을 내시길래, 평상시엔 뭘 드시냐고 여쭈었다.
드시는 약은 많고, 빈속에 약을 드실 수는 없어서,
"찬밥 한 숟가락 물에 말아서 후루룩~!"
드셨다고 하시면서 입가를 훔치시는데, 내 눈시울이 까닭없이 뜨거워진다.
실내에서는 다른 재소자들 눈이 있으니까 '만기방'이라고 석방 이틀 전에 나가서 묵는 독립 사동에 가서 연탄아궁이 불에다 부침개를 부쳤다. 머리 위로는 싸락눈이 풀풀 날리고 우리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마가린을 프라이팬에 녹여 김치를 섞은 밀가루 반죽을 부어서 부쳤다. 역시 김치부침개는 잘 익으면 가장자리가 아삭거리고 고소하고 제일 맛이 있다. 거길 떼어 먹다가 바라보니 준식이 눈에 눈물방울이 고였다가 톡 떨어졌다.
"왜 그래, 뜨거워서 그러냐?"
"아니요."
"그럼 뭣 땜에 그래?"
"어머니 생각 나서요."
(44쪽, '유배지의 한 끼니'중에서)
황석영은 이 글을 쓰면서 소지 아이 준철이가 생각났을 것이고,
준철이는 김치부침개의 가장 자리를 먹으면서 어머니 생각이 났다지만,
난 찬밥에 물 말아 드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지금은 그냥 쉽게 이해 되는 일들을 그땐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싶어,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 어쩌지 못하겠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사람의 정신세계를 송두리째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지만,
밥 한끼 같이 먹는다고 하여,
그 사람의 정신세계와 생활방식 등을 온전히 이해하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끼를 시작으로 그렇게 점차적으로 마주보고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맞추게 되다 보면,
정신세계나 생활방식이나 생활습관 따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그렇게 서로서로 맞추고 엮이고 스며들거나 어긋나기도 하면서,
공통되거나 변화된 행동이나 습관, 기호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일 것이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먹을 수 없다거나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때의 맛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이 변했든지 세월이 변했든지 했을 터이기에.(83쪽, '배고픈 날, 장떡 지지던 냄새'중에서)
때문에, 한솥밥을 먹던 사이이거나 같이 밥을 자주 먹던 사이라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 변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와 방향으로 사람도 변화할 것이므로,
변화라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맛이 변했다면,
나는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것이므로) 세월보다는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때의 사람은, 예전에 한솥밥을 먹을때나 같이 밥을 자주 먹을 때의 사람은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삼 년 전에 김용태와 여운이 병명은 다르지만 둘다 말기 암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때문에 주변 친구들은 두사람 다 술을 끊었을 것으로 믿었지만 나중에 들려온 소문으로는 죽을 줄 뻔히 알면서 환자 둘이 몰래 만나서 음주를 계속한 모양이었다. 평론가 유홍준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직접 의사 표명한 바는 없으나, 죽음을 앞두고 음주를 계속한 것은 예술가의 위엄'을 지키려는 행위였을 거라고 한다.(253쪽, '떠나간 친구가 남긴 맛'중에서)
예전에 나왔던 이 책을 개정판으로 다시 구입한 까닭은 '1권 1식 결식아동후원'이라는 문구 때문이기도 했지만,
개정판에 김용태 님과 여운 님의 그것이 추가된 '떠나간 친구가 남긴 맛'이 궁금하기도 해서 였다.
그러고 보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고 간에,
예술가들은 나름 섬세한 감각을 지닌것이 틀림없고,
그 섬세함은 미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가 보다.
이러구러하고 간에 '떠나간 친구가 남긴 맛'은 단순히 맛이 아니라, '예술가의 위엄'을 지키려는 숭고한 행위였을 것이다.
찬밥에 물 말아 드시던 어머니를 좀 더 일찍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어머니가 계기가 되어 환자로 오시는 어르신들의,
"찬밥 한 숟가락 물에 말아서 후루룩~!"
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으니, 그걸로 된거다.
그만하면 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