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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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는 '김춘수'의 시 '꽃'을 들먹일 것도 없다.

남들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칭찬을 해대도, 범우주적 에너지가 발산될 그때, 부합하는 주변 환경이 협조를 해서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야 '인연'으로 발전할 수 있고,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양손 엄지 척 추천하는 책이라도, 머리가 어느정도 굵고 생각이 무르익어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에야 내게로 와서 한권의 양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적절한 때와 그에 부합하는 주변 환경 또는 머리가 어느정도 굵고 생각이 무르익어서 라고 하여서,

감나무 밑에 입만 벌리고 누워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라는 얘기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이 책은 몇 년전 한창 유행일때 들였으나,

매번 '프롤로그'에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였고,

그때마다 내 동양 역사 쪽의 지식이 지극히 소박하기 때문이라고 자위하곤 하였다.

 

요즘 다시 고전읽기에 발동이 걸려, 논어를 공부해볼 요량으로 이 책 저책 건드리는 중이었다.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리 어려운 한자로 쓰이지도 않았는데,

대충 소리내어 읽고 어찌 어찌 해석은 하겠는데,

내가 알고 있는 한자의 쓰임이나 용법으로 해석하면 의미가 모호해 지거나, 용어의 뜻이 어긋나서 이상해져 버린다.

기존의 해석과 비교해 보려고 열권의 책을 찾으면 열권의 해석이 제각각 다 다르다.

 

난감하던 차에 이 책의 프롤로그가 생각났다.

제자백가의 속내를 직접 맛보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삶과 사유가 어떤 조건에서 시작되었는지 이해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화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대화란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는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려면, 그의 삶과 생각이 전개되는 문맥 혹은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을 잘못된 문맥에 놓고서 이해하면, 우리는 그와의 대화에서 무엇도 배우기 어려울 것이다. 제자백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삶의 풍경과 그들이 전제한 사유 문법을 살펴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어떤 위대한 사상도 결코 허공에서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16~17쪽)

 

사실 내가 논어를 깊이 읽어보겠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김명근의 '이기적논어읽기'에서 '이인1장'을,

어짊에 처함이 아름다움을 이루니 어짊에 처하지 않으면 어찌 지혜를 얻겠는가.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라고 하여, '里를 '마을'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처한다'라는 동사로 해석한다'고 한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여러 부분들을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논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논어 속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삶과 생각이 전개되는 문맥과 배경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어야 할텐데,

동양 역사 쪽으로 지식이 소박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기적논어읽기'라는 책 속의 김명근-개인의 삶과 생각이 전개되는 문맥과 배경으로 미루어 짐작하고는 '이상하다, 그치~!'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강신주의 주관을 될 수 있는대로 배제하였으며,

(뒤에 미주와 참고문헌도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다.) 

꼼꼼히 읽기만 하면 제자백가가 살았던 시대의 삶과 생각이 전개되는 문맥과 배경을 엿보는 것은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상나라 왕이 지배하던 읍(邑)이 있었고, 일종의 타자적 공간 또는 외부공간이라 할 수 있는 방(方)이 있었다.

('집 잃은 개'의 '리링' 같은 경우는 里를 일종의 마을단위로 해석했었다.)

이 책에서는 里까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里를 굳이 명사가 아니라 '처한다'라는 동사로 해석해야 할 타당성 같은 건 찾지 못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목한 점은,

우리가 논어를 비롯한 고전에서 만나게 되는 한자용어들을 오늘날 변형된 뜻 그대로 적용시켜 해석하다보면,

공자가 살았고 논어가 읽혔던 그 시대의 한자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힌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백성이라고 하면 일반 민중을 떠올리게 되는데,

상나라에서 백성(百姓)이라고 하면 귀족들만 姓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귀족들을 백성(百姓)이라고 불렀고,

주나라에서는 人이라고 불렀고,

일반 민중은 상나라에서는 소인(小人)이라고 불렀고, 주나라에서는 民이라 불렀다.

 

또 하나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와 관련하여 알아둘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종법사회였다는 것이다.

천자, 제후, 경대부, 사(士)가 엄격하게 지켜졌는데,

사(士)의 맏아들은 그대로  사(士)이지만, 동생이나 서자들은 모두 民이다.

사는 경대부 아래 약간의 토지를 가질 수 있었고,

평상시 육예(六藝)라고 불리는 여섯가지 전문기술을 익혔는데,

예(禮): 귀족사회의 예의범절, 악(樂): 행사에 사용되는 음악, 사(射): 활쏘는 기술, 어(御): 전거를 모는 기술, 서(書): 글을 읽고 쓰는 기술, 수(數): 점을 치고 해석하는 기술로 문무를 겸비한 계층이었다.

 

공자 또한 어머니 안씨가 아버지 숙량흘의 셋째 부인이었으므로 士人 신분이었던 셈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라고 하여 많은 선생과 많은 학파가 있었고,

학파는 스승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들어서 청소,취침, 세면, 등의 일상사를 함께 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탁월한 士人, 즉 賢士를 목놓아 고대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스승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혜를 배워서 현사가 되거나,

스승이 객경이라는 제후에 발탁된다면 제자들도 같이 따르게 되어 입신양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사기'에 따르면 공자 휘하에 30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공자가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 속으로 들어가서 논어를 읽어야,

그들의 삶과 생각이 전개되는 문맥과 배경을 토대로 공감각적으로 논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남들이 일반적으로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있고,

내 입장이나 처지에서 상대방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통념이나 나의 주관적인 시선을 배제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바라봐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공감과 소통이라는건 아마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세상의 통념이나 나를 배제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일.

상대방의 삶과 생각이 전개되는 문맥과 배경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앞으로의 논어읽기가 좀 수월해 질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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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6-03-03 18:15   좋아요 0 | URL
강신주 책 중에서는 꽤 괜찮은 책입니다. 그의 주관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요. 혹시 춘추와 전국 시대에 관해서 관심이 있으시면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를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강신주의 책보다는 진도도 빠르고 재미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6-03-04 14:56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이런 귀띔 정말 좋습니다~^^

2016-03-06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6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8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