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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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본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등을 행사하는 안보관련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는데요,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은 87세의 할머니 자이이 아사코씨가 이에 항의해서 아베 총리에게 보낸 손편지에 적힌 말입니다. 자이이 할머니는 70년전 고베 대공습 때 집이 두 차례나 불타고 남편이 부상에 시달리는 등 참혹한 '진짜 전쟁'을 체험한 세대입니다. 자이이 할머니는 "전쟁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슬픔을 지위가 높은 분은 알 수 없는 건가,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이 줄어 들면서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며, '다리가 아파서 반대시위에 참여할 수 없어 대신 손편지를 보내 항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아침 신동호의 '시선집중'을 듣는데, '말과 말' 코너에 이런 얘기가 나왔었다.

며칠에 걸쳐 김선우의 '발원1, 2'을 읽었다.

그동안 그녀의 작품들은 내게 들쭉날쭉해서,

시집<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같은 경우에는 무한감동을 받았다고 설레발을 쳤었지만,

수필이나 소설들은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와 불교신문이 공동으로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라는 기획의도로 요청해,

연재되었던 것을 거듭 퇴고 해서 이 책이 되었다는데,

그동안 광고를 통해 몇 번 만났지만, 비껴갔었다.

그러다가 알라딘 서재 이웃의 페이퍼 글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시작하게 되었다.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발원의 뜻이, '어떠한 일을 바라고 원하는 생각을 내는 것'이라는 뜻 말고도,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다짐하는 맹세, 또는 부처나 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뜻하는 종교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는데,

내가 그녀가 여자 작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시작해서 그랬는지,

그녀가 요석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요석을 대등하게 내세운 이유를 잡아내지 못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이 책의 작중화자라고 생각하고 감정이입했던, 원효의 그것과 일치되지 않다보니,

글에서 느껴지는 임팩트가 약했다.

 

읽는 내내...뭔가 살짝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는데,

2권 말미에서 '강신주의 해제'를 만나면서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충분히 채워지니,

하나의 좋은, 아니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종교와 정치는 전혀 다른 얘기인듯 보이지만,

어찌보면 같은 얘기이다.

삶과 죽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종교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고도의 복선을 깔아,

개연성과 핍진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음은 물론,

작품 구성면에 있어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 이르기까지 적절하게 안배하였고,

등장인물에 있어서도, 대칭과 대조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균형과 조화를 맞추려 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일례로,

원효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의 법명이고,

당시 사람들은 새벽(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 원효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그랬으리라 예상되는데,

원래 아름다울옥'요', 돌 '석'자를 쓴다고 문헌에 나와 있는 '요석(瑤石)'이

이야기 속에서 빛날 '요', 저녁 '석'자를 쓰는 '요석(曜夕)으로 바뀐다.

 

6두품의 원효를 처음 화랑에 뜻을 두었으나 끝내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캐릭터로 만든 것이나,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들어 전시에 앞장 서서 나라를 지키는 화랑과 대립 각을 세운 것은,

소설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와 종교는 모두 어떤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 일반 서민을 위한 것이라는 걸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장치쯤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여왕이,

"비두 벌판에서 내가 너를 구해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는 계산이 분명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장면에선,

현실의 누군가가 오버랩 되어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원효에게 관대하고 넉넉했으며 요석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했던 여왕은,

나중에 원효를 전쟁에 승병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요석을 이용하는데,

지독하게 정략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 있는데,

요석을 곁에 두고, 이용하기도 했던 그 여왕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첨성대와 황룡사ㆍ분황사를 만든 것은 선덕 여왕이고,

그런 선덕여왕과 진덕, 진성 여왕을 거쳐,

태종무열왕의 시대에 이르러 원효와 결혼했다더라 라고 알고 있었는데,

게다가 원효가 황룡사에 머물었던 건, 진덕여왕 2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이,

누구라고 지칭되지 않은 한명의 여왕이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묘사되다가,

바로 요석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넘어가 버리니까 말이다.

 

책력과 천정에 대해서 언급되면서 첨성대가 거론되는데,

첨성대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운행관측의 측면보다는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의 의미가 강했으리라 짐작되고,

또 하나 요석이 길쌈을 장려하는 등 적극적이고 당당한 여인네로 묘사되는데,

길쌈으로 만든 게 광목이고 거기에 천연염료로 염색하는 것까지 나오는데,

우리나라에 문익점이 목화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고려말로 알고 있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런 세세한 것들이 자꾸 어긋나 버리면,

개연성을 잃게 되고 재미가 떨어진다.

 

물론 소설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가상의 설정이겠지만,

원효는 워낙 중요한 역사적인물이어서 정확한 연도를 알고 있는데,

소설 속 설정이라지만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되면,

알고 있는 그것에 억지로 꿰어맞추려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소설을 가지고 논리적 오류라고 억지를 쓰게 되고,

그 다음부턴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지고, 개연성도 떨어지는 듯 느껴지지만,

그건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내가 처음 저자 김선우가 요석에게 감정이입하여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이 책이 아쉽다고 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원효를 스님인것에 초점을 맞춘게 아니라,

요석을 사랑하고,

요석과 함께 삶을 살아간 인간 원효에게 초점이 맞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러다가 2권 마지막의 '강신주의 해제'와 '작가 후기'를 통하여,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하려 했던 얘기가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실마리가 풀리면서 고개를 주억여가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니가 그려내려 했던 건 고승 원효나 깨달음을 얻은 큰 스님 원효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 사이로 뛰어들어,

울고 웃으며 같이 살아간 인간 원효를 그리려 했기 때문에,

요석의 일과 삶과 사랑이 맞물려야만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소 여성적인 문체이고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다시 얘기의 처음으로 옮아가,

종교와 정치는 닮은 구석이 있다고 했던 이유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냐, 너를 바꾸고 싶은게냐?"(1권,334쪽)

라며, 세찬 빗줄기가 되어 원효의 등짝을 후려쳤던 혜공의 목소리가 책을 읽고난 지금까지 각인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왕의 무덤 곁에 백성의 무덤이 있는 것이 이상할 바 없노라. 성군이라면 익히 배워야 할 인(仁)의 정치가 그것을 허한다.ㆍㆍㆍㆍㆍㆍ"(1권,316쪽)

라던 여왕의 의지와 속뜻이 읽혀서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시민들 속으로 뛰어들어 몸소 겪지 않으면,

시민들의 슬픔을 지위가 높은 분은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가장 감동적이었으며, 내 자신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준 부분은,

그동안 머리나 마음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던,

내 자신을 자극시킨다고 생각했던 깨우침이 아니라,

"흐응, 그렇지, 깨달음은 좋은거야.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빠져 있으면 깨달음이고 뭐고 다 귀신 밥이지. 흐응, 너도 알겠지? 젤로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다, 응? 깨달아서 뭣에 쓰게?"(1권,342쪽)

라는 선문답 같은 한마디였는데, 이는,

부처를 사랑하는 것과 부처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로 현현하고 종내는 서로 통하여 어우러질 것이라는ㆍㆍㆍㆍㆍㆍ(1권,345쪽)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값진 것이었다.

 

"집착의 대상을 모두 없애서 열반에 머물 수 있지만, 커다란 자비의 마음으로 인해 열반마저도 없애 머물지 않는다."

원효의 주저 『금강삼매경론』에 등장하는 말이다. 혼자서 열반에 들었다고 희희낙낙하는 사람이 어떻게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진흙탕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온몸에 진흙이 묻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법이다. 옷을 깨끗이 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은 흙투성이의 사람을 만질 수도 없을 것이다.(2권, 281쪽)

강신주의 해제가 아니었으면, 요원했을 수도 있겠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대상이 없으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깨달음ㆍㆍㆍㆍㆍㆍ.

사람만이 힘이고 사람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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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8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8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5-07-18 11:40   좋아요 1 | URL
쟁(爭)을 화(和)로 이끌어가려 노력했던 원효는
시대와 종교를 초월하는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무꾼님~!



양철나무꾼 2015-07-19 12:23   좋아요 1 | URL
전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지누를 떠올렸어요. 이지누의 절터 톱아보기랑 너무~다른 듯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짧은 리뷰 속에서 쟁을 화로 이끌어가려 했던 원효를 읽어내신 님, 쫌 멋지신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