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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겠다 -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1월
평점 :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참 행복할 것 같다.
그가 쓴 책들을 읽다보면,
그가 퍼뜨리는 행복함이 마치 햇살조각처럼 여겨진다.
난 그 햇살조각을 주워모아서라도 좋으니,
수해(혜)를 누리고 싶어진다.
가끔 ‘열하’가 미웠다. 나는 혼자 읽을 때는 이런 생각을 단 한 순간도 한 적이 없지만, 그녀가 온통 책에만 빠져, 나를 무시하고, 나와 운우지락을 나눌 때처럼 흥분할 때, 책이야말로 만만치 않은 연적이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책 대신 나만 보라 말할 수도 없다. 책을 질투하는 사내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런 내 마음이 때론 우습고 때론 한심했다. 더욱 비참한 사실은 이 책이야말로 너무 멋지고 사랑스러워, 내가 여자라도 매혹당하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책과 사귀었다. 깨끗하게 멀찍이 두고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넘기는 식이 아니라 연모하는 사내 대하듯 그 책에 자신의 감정을 옮겼다. 겉표지에 입 맞추고 손바닥으로 쓸고 글자 하나하나를 검지로 만지며 내려가고 옆구리에 끼거나 젖가슴에 댄 채 잠들고 머리맡에 두었다가 새벽잠에서 깨자마자 냄새 맡고 여백에는 검지로 도장 찍는 흉내를 내며, 이 책과 영원히 함께 머무를게요 맹세했다. 그 책에 비하자면 나와의 사랑은 드문드문 허거웠다. 그녀와 나 사이에 책이 낀 것이 아니라 그녀와 책 사이에 내가 불청객처럼 찾아드는 격이다. 내가 슬쩍 책을 서안 밑으로 밀어두기라도 하면 그녀는 냉큼 책을 찾아서 품에 안고 앙처럼 웃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도 분명 저는 살았었죠. 한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요. 제삶의 첫 자리엔 이 책이 놓였고, 그때부터 전 비로소 숨 쉬고 걷고 밥 먹기 사작하였답니다.”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 고백이었다.(열하광인 상,114쪽)
책읽기를 이렇게 황홀하게 표현하니 말이다.
이렇게 행복한 그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책을 자기가 좋아서 기꺼이 읽는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두고 많은 말들을 한다.
그리고 알라딘 서재, 이 동네는 책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보니,
책을 읽고 권하고 추천하는 사람들을 보면,
책을 읽고 권하는 행위가 재밌고 좋아서, 인 경우도 있지만,
직업과 관련된 경우도 있고,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과 이익과 관련된 경우도 있다.
내지는 습관처럼 책을 읽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책팔이나 도서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어쩔 수 없이 읽는 경우도 봤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서 책을 읽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그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는 건 (그들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덕분에,
그의 책을 읽는 동안 나 또한 행복했고,
'읽어가겠다'를 통해 그를 엿보는 동안,
한 없이 유쾌했다.
기실, 한때 그에게 열광했었다.
그가 책을 내놓을때마다 잉크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사서 읽었었고,
그가 다작의 작가라는 사실이 축복 같았다.
그런 내가 그를 향하여 시큰둥해진 것은 아마도 내가 책을 좀 넓고 깊게 읽어보겠다며 고전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였나보다.
그의 책 속에서 만나게 되는 문장이나 내용들이,
언젠가 읽었던 박지원에서도 본것 같고,
노자, 장자에서도 본것 같고,
이옥의 그것이랑도 일치하고 하는데,
그걸 개연성과 핍진성의 관점에서 소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고전을 베껴 자기 것인양 젠 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걸 중복해서 읽는건 시간 낭비라고 여겼다.
나이를 점점 더 먹어가고,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게 아닌데도,
읽다보면 내용이 중첩되는 부분이 생겼다.
그걸 꼭 모방이나 베껴 쓴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는데,
그런 상황이 자주 생겼다.
그건 고전 이론이나 사상, 학설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또는 정수,
또는 근간이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일텐데,
그게 같은 걸 두고 모방이나 베껴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읽어가겠다'를 고전을 읽듯 야금 야금 아껴 읽었다.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검소하고 소박해지자고 많이 얘기한다.
그리고 검소해지고 소박해지는 방법으로 버리고 단출해지는 걸 얘기한다.
난 여지껏 버리고 단출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안으로 여미고 응축시키는 것을 내포한다는 의미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건 편견과 선입견 안에 날 가두는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버리고 단출해지고, 여미고 응축시키고, 를 등가로 놓지 않았었는데,
나혼자서 '홀쭉해진다'는단어를 가지고 그리 상상한 것이었다.
흔한 물을 가지고 예로 들자면,
잘 벼리어 성체하는데 쓰면 성수가 되고,
오물을 닦는데 쓰면 개숫물이 된다.
바람도,
불씨를 부추겨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도 하지만,
안개나 연기를 흩어 성기게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버리고 단출해지는 것도 검소하고 소박해지는 한 방법이지만,
흩어넣고, 성기게 하고, 번지고 스며 물들게 하는 것 또한,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어떤 의미로는 검소하고 소박해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들,
이를테면 하늘이나 땅, 해, 달, 바람, 물, 쇠 같은 것들은,
속성을 달리한다고 하여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누구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으므로 가짜나 도둑 따위를 얘기할 수 없듯이,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인, 고전을 어찌 하였다고 해서 모방이나 베껴쓰기 따위의 말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소하고 소박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덜어내고 홀쭉해지는 방법이 아니라,
때로는 응축시키고 농축시키기도 하고,
그리하여 더 단단하게 집약시키기도 하는 걸 보면서 의문이 들었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중심부엔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랬다가도 이내 점묘법처럼 점점이 흩어져서,
이렇게 저렇게,
얽히고 섥히고,
번지고 스며 물들 수 있는 것들처럼,
모양이나 형태를 바꾸더라도,
그러면서 번지고 스며 물들더라도,
끝내 잃지 않고 지키는 본성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불러야 하고,
또 다른 이름으론 고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나 지금 여기'의 문제에 주먹을 내지르며, 어깨를 비비며, 입을 맞추며!'(9쪽)라며,
김탁환이 '젊음'이라고 부르는 책들은 다른 이름으론 '고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걸 삼단논법형태로 전개시키면 이렇게 되겠다.
젊음은 고전이다.
고전은 자연이다.
자연은 오랫동안 변치않는다.
고로, 오랫동안 변치않는건 젊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