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장서의 괴로움'을 읽은 후,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장서의 괴로움'을 읽기 한참 전에,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만나고(고르고) 사귀고(사용하고) 관계를 이어갈까(보관하고) 궁금하던 차에 만난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을 넘겨본 것은, 책 제목 중의 한 글자'식'자를 '혜'자로 내 맘대로 바꾸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데,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저 고민들에 대해 공감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무언가 혜안을 얻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내게, 지름신과 장서를 부추기는 대책없는, 대략난감한 책으로 분류되어 한쪽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었다.

  지식: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지혜: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장서의 괴로움' 이후 책의 소장에 관해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을때 내 몸을 누일 땅 한 평은 고사하고,('매장'에 호의적이지 않은 쪽이라~--;)

책 한 권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보관할 곳은 (집안 서재는 고상하게 말 한거고) 방 한쪽에 덩치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마음 속일테니,

읽은 책을 두번 다시 읽게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쌓아두지 말고 없애거나 나눠준다는데는 변함이 없는데,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읽지도 않은 책으로 책탑을 쌓아놓고 책을 또 들이는 일은 지양하고 단출해지자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던 터였는데,

이런 책들의 경우, 읽고싶은 책이 곳곳에 포진해 있으니,

지적허영이고 사치라며 아무리 강하고 모질게 세뇌를 시켜도 허사다~ㅠ.ㅠ

 

조국은 시 이외에 진화심리학에도 관심이 많다.

ㆍㆍㆍㆍㆍㆍ

"제가 읽은 책 중에 동물 실험이 있어요. ㆍㆍㆍㆍㆍㆍ이 새로운 먹이환경에 가장 빨리 적응한 침팬지는 젊은 암컷이었어요. 그리고 젊은 수컷, 그 다음에는 늙은 암컷이 차례로 적응했는데 늙은 수컷만은 마지막까지 기존의 방식으로 먹이를 달라는 거예요. 무슨 이유인지 배가 고파도 끝까지 먹지 않았죠. 늙은 수컷의 비애죠. 이런 모습이 우리 인간에게도 있어요."

 조국은 이 늙은 수컷 침팬지의 모습에서 '나이든 괴팍한 노인'을 보았다고 했다. 남의 말은 듣지않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 남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힌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귀를 막고 도무지 들으려고 하질 않으니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자신이 만들어놓은 벽은 높아지고, 자신을 둘러싼 껍질은 두꺼워진다. 그들은 자신의 벽을 낮추고 껍질을 깨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껍질과 벽이 있어요. 이것들을 깰 때에만 소통이 되고 변화가 되며 생존이 가능하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깨는 건 힘들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하죠. 그리고 그런 능력은 독서를 통해서 길러집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감성이 다른 사람의 글, 자신과 전공이 다른 사람의 글, 즉 책을 볼 때 껍질이 부드러워지죠. 껍질이 부드러워져야 다른 게 들어올 거 아닙니까."(19~20쪽)

 

암튼, 이 책'지식인의 서재'와 '장서의 괴로움' 사이에 나의 책에 관한 습관이 크게는 아니고 미묘하게 바뀌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견고해지는건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아니다, 견고하다는건 강하고 젊었을때나 적절한 표현이고,

나이를 먹으면서는 조국의 말처럼 괴팍해 보일 수도 있으니 경계하여야 하겠다.

 

그동안의 난 좀 치열하게 살았었고, 책도 전투하듯 치열하게 읽었었다면,

이제는 책을 즐기며 기꺼워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의 책이 치열한 경쟁상대였다면,

지금은 오래된 연인같기도 하고 숨겨둔 정부 같을 때도 있으며, 때론 길동무 같거나 동반자 같을때도 있다.

 

 

실은, 오늘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마찰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위태로웠는데, 그때마다 서로 서로 외면하거나 비껴가 버리고 말았었다.

그런데, 번데가 앞에서 주름잡고,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 한다고,

학사까지 합하면 25년차, 임상만도 19년차인 내 앞에서 매번 모든 통증을 경락으로 연관시키려는것이나 매번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니가 경락을 아니?'로 시작해서 '니가 경락을 무시하는 듯'으로 이어지길래,

기가 차서 '둘이 아는 경락이 다른건가보다'라면서 '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언젠가 다른 대형 포털에 써서 이곳에 비밀 글로 돌려놨었던 '그녀의 취향' 이라는 글을 언급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타성에 젖어서도 안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일이,

다시 말해서, 내 경우에 치료가 적어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이 드는건, 환자와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경락을 자극하면 그 경락에 맞는 리액션이, 피드백이 있게 마련이다.

리액션을 보면서, 예후를 판단한다.

그냥 대충하는 대증치료는 아닌 것이다.

그런 내게 '경락을 아느냐'를 되풀이 하여 묻는다는 것은,

물론 그게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많은 것을 내포한 중의적인 의미라고 그 자신을 합리화 한다고 하더라도,

날 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요즘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나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맥락을 같이 하는 분은 북 디자이너 정병규 님이시다.

"책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고, 성장에 도움이 되고,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고, 심지어는 삶의 요령까지 가르쳐준다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이라는 건 그 자체로 근본적인 매력이 있어서 나름대로 삶을 영위하는 안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책이 삶의 일부로 들어오거든요. 그때 하는 것이 독서입니다. 게다가 책을 읽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얼마나 좋은 삶이겠어요?"(145쪽)

 

그런 의미에서 마음만 연다면 환자와도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자극, 액션이란걸 가하면 리액션, 피드백이 있게 마련인데,

그게 자꾸 어긋나거나 비껴가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얘기이니...반성을 해야 하는 걸까?

 

근데, 난 조국이 말한 '나이 든 괴팍한 노인'이 연상된다.

자신의 껍질과 벽을 깼는데도,  상대방의 껍질과 벽이 장애물로 여겨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 전까지의 난,

'벽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폴짝~!'

그랬겠지만,

이젠 껍질과 벽을 깬 연후라, 웅크리고 뒤로 물러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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