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를 읽고나서 필(feel) 충만하여 '1.4킬로그램의 우주, 뇌'를 집어들었다.

'신경 의학에서 뉴로 마케팅까지 융합 뇌과학의 현장'이라는 겉표지의 소 제목을 본 터라 쉬울거라고 생각은 안했었지만,

첫강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카이스트 명강'이란 타이틀을 달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용, 정재승, 김대수 이 세분들은 강의가 깔끔하기로 유명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강의를 이해 못하면 다른 누가 강의를 해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이다.

 

 

 

 

 



 

 1.4킬로그램의 우주, 뇌
 정재승.정용.김대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7월

   

하물며 소싯적에 해부학이란 걸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해부학 용어로 등장하는 의학 용어가 중구난방이어서 못 알아먹는다는 것은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난 그동안 한글을 제법 사랑하고 잘 사용한다고 자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의 반도 알아먹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시작부터 기가 죽어 책을 덮어버릴 수도 없고, 낭패였다~--;

위 사진 속의 글을 뇌에서 인체 전반으로 의미를 확장시켜 슬쩍 문맥에 맞게 바꿔 본다면,

소싯적에 해부학 책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이렇게 해부학 용어를 두고 잘 몰라서 한참 들여다 보게 된 까닭이,

많은 사람들이 인체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부학계에서 한글단어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글쎄, 정작 한자어로 해부학을 공부했던 세대들이 혼란스러움을 겪는 한글단어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체에 대한 이해는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그동안 해부학에서 사용되었던 한자어가 대부분 일제의 잔재이고,

그래서 일제 잔재를 한시바삐 청산하기 위하여 한글 이름으로 바꾸는것이라면,

실용성이나 접근성 등의 측면에서 설득력이 없더라도,

우리가 북한처럼 한글을 잘 살려쓰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걸 부끄러워 하며,

한글이 다의어여서 의미전달이 모호하여 불편하더라도,

한글 단어로만 이루어진 해부학 용어 사용에 대한 타당성은 인정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동안 한자어로 쓰여진 해부학적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한글단어가 어떻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글이 다의어여서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 풀어쓰거나 설명을 하게되면 용어가 한없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위해서 한글 단어로 바꾼 것이라면,

설명을 위해 풀어쓰다보니까 길어지는 부분은 간결성이라는 면에서 위배된다.

그렇다면 해부학 용어를 한글단어로 바꿀게 아니라, 한글 사용법을 익히는게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글은 다의어여서,

글이나 말 만으로는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 될 수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래서 글에서는 한자어를 병기하는 걸로 설명을 대신 했었고,

그래서 글이나 말 등의 문자 외에도 음의 고조나 장단 ㆍ 음색ㆍ어조나 어투 ㆍ몸짓 ㆍ얼굴 표정이나 분위기 등 의미의 전달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노병사'가 삶의 과정이지만,

병은 그냥 병일 뿐이지만, 의학에서는 이를 더 세분해서 질병, 증후군, 질환, 장애 이렇게 네가지로 구분(90쪽)하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어떤 병에 증후군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애기는 원인을 아직 잘 모른다는 뜻이란다~--;)

 

바뀜과 변화는 필요한 걸까?

아니면 늘 한결같아야 할까?

세상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늘 한결 같아야 할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걸 가르는 데는, 다시말해 구분하는 데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기준과 방향점이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답보가 되거나 편견 또는 선입견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는 고집이나 아집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요즘 '신영복'님의 '강의'를 다시 읽고 있는데,

거길 보면 '역易'을 '주역'의 '계사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쪽)

처음 주역을 읽을때는 역(易), '변화'에 치중을 하였다면,

그다음 읽을때는 구(久), '오래지속된다'에 연연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역이 64괘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삶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인간의 마음 또한 그렇게 바뀌고 변하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변덕이고 변절인 것처럼 폄하하였다.

 

고인 물은 썪는다고 오래 지속되거나 머무르면 안된다고도 생각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한결같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은 퇴보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쯤에서,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겠다.

 

성격이 좋게 말하면 까칠하고 나쁘게 말하면 더러워서,

매사에 흑백 논리가 분명하게 살려고 했던 내게,

역(易)과 구(久)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이 돌아왔다.

역(易), '변화'의 속성에서 본다는 것은 순간순간을 치열하고 가열차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구(久), '오래지속된다'라는 것은 '영원한 도돌이'와도 같은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변하지 않는다가 될 수도 있고,

한발 떨어져서,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변화가 아주 조금씩 천천히 눈곱만큼씩 이루어져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종교 따위는 없는 내가,

먼 이국 땅의 말도 안통하는 교황의 말한마디에서 깨달았다고 하면 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교황은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때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지만,

이 모두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이건, 종교고 과학이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치이다.

다시말해, 종교고 과학이고, 정치고 이념이고 간에,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은... 없다.

 

 

암튼,

새로운 의학 용어를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해가며 툴툴거리고 구시렁거리며 변명할 생각만 하는 나,

어쩔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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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20 01:38   좋아요 1 | URL
해부학까지 섭렵하시니넘 우러러볼 뿐이어요

양철나무꾼 2014-08-26 18:25   좋아요 1 | URL
섭렵이 아니라 들여다 봤을 뿐이라는~--;
다치셨다는 무릎은 좀 어떠세요?
빨리 나으시라고 제가 '호오~=3'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