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일곱 시, 나를 만나는 시간
최아룡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보대끼며 살아가기 마련이고,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때로 다른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받기도 한다.

 

유약한 성격 탓인지, 또는 소심한 성격 탓인지 자잘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눈물 흘리고 하지만,

그건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사정일 경우이고,

잔뜩 움추러들고 그리하여 더 단단하고 높게 벽을 쌓아 올릴 뿐, 누군가에게 얘기해본 적도 그러니 위로받고 치유받은 기억도 없다.

직업 상,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치료하느냐고 할까봐 두려워서 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가정 교육을 그렇게 받아왔었던 것이고,

내 자신을 말끄러미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택한 것이 익명의 글쓰기였다.

 

책을 읽고 읽은 느낌이나, 거기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글로 옮겨 쓰는 행위를 통하여,

나를 돌아보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나를 찾고,

무엇보다 배설해낸다는 행위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었다. 나를 위한 해우소.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글쓰기가 누구에게 보이거나 말을 걸거나 소통을 위한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기능이 있다면, 그건 파생적이다.

 

언젠가, 여자들의 관계는 수다에 의해서, 남자들의 관계는 네트워킹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10여년전 기사이고 지금은 모든 관계가 네트워킹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상호적인데 반해 네트위킹이라는 것은 선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여지껏의 관계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네트워킹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관계도 일종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쉬이 공허해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즐찾 수나, 공감 수, 댓글 수 따위에 연연하다 보면,

내가 쓰는 글이나 내가 토해내는 고민, 들은 미미하게 느껴지는데,

빵빵한 즐찾 수나, 공감 수, 댓글 수, 들을 자랑하는 이들의 댓글과 덧글을 읽다보면,

전혀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는 피드백도 있게 마련이다.

시인컨대, 나도 뜬금없기론 둘째가라면 서럽다.

나름 과도기를 겪었지만,

이젠 글쓰기는 행위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심할 수 있고, 그리하여 홀가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었다.

장금이 버전으로 좋은 걸 좋다고 하는데 왜 좋냐고 물으시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부제에 '요가'라는 단어가 들어가 지루할까 걱정할건 전혀 없어 주신다.

그렇게 따지면, 요즘 대세인 강신주도 '철학'을 매개로 '힐링'을 가장 싫어한다면서 힐링하지 않았던가?

체력이 약하면 강하게 만들면 되지 굳이 '저질체력'이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다. 저질체력이라는 표현은 건강하고 활동적이고자 하는 마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 (19쪽)

요가가 연관된 내용은 딱 요기까지이고, 힐링 에세이라고 해야 한다.

글 자체로 치유의 힘을 지녔다.

 

이 책의 저자는 최아룡이다.

최아룡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지녔음을 아는 사람은 알것이다.

 

 

 

얘기는 다시 카타르시스, 해우소, 또는 대숲으로 돌아간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그 옛날에 대숲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를 외친 이발사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타인에게 털어놓지 못하겠으면 나처럼 이렇게 글쓰기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겠다.

네트워킹이 좋은것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고,

다 털어놓을 필요 없이, 선별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중요한건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혼한스럽거나 정리가 안된 마음을 정리하거나 가다듬는 그 과정이다.

그러니까, 내 글을 읽을수도 있고 안 읽을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얘기하면 된다.

 

마음(, 다시말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과정을 글쓰기를 통해서 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람을 상대로 할 수도 있게 된다.

 

나는 이제 사람은 독립적인 객체이면서, 상대적인 존재라는 걸 안다.

부부나 연인 또는 부모나 자녀 와의 사이에서 통용되는 진리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때, 내게 맞는 상대를 택할 수 있는 것이고,

(어쩜 이건 거울에 비친 나의 또다른 상의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의 위치와 영역이 있을때, 상대방의 위치와 영역을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전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 고전인 이유는,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건데, 이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치유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이는 나의 위치를 자리매김 할 수 없고,

상대가 있어야 나의 위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 그게 정체성이다.

 

치료를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이거다.

사람 마음 속에 여러가지 감정이 있는데, 그 여러가지 감정 중에는 상처도 있다.

사람의 상처를 보고 맞닥뜨리는데는 힘이 필요하다.

자기자신을 객관화하는게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의 힘이나 상처의 크기를 알아야 상대의 그것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는 힘보다 상처가 클때는 맞닥뜨리기가 힘들고 위험하다.

그러니까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는, 번짓수를 잘못 찾거나 오지랖을 부리지 말고 볼 일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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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02-25 15:35   좋아요 1 | URL
작년에 어느 요가 영상을 보고, 내년에는 요가를 한번 배워볼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핸드스탠드 즉 물구나무서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단번에 매료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