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그러고보면, 난 그동안 이윤기 님의 작품들을 좀 읽어주셨다.

읽으면서 좋다고 설레발을 친 경우도 있었지만,

어설픈 내눈에도 엉성한 번역들이 들어와서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내가 번역 오류를 잡아낸 건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님의 작가로써, 번역가로써의 삶이 얼마나 가열차고 치열한 것이었는 지를 몰랐던 고로,

'비밀의 계절'개정판을 계기로 그렇게 그렇게 소원해 졌었다.

2010년 8월인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별세하셨을 때까지만 해도,('애도하다'페이퍼 링크)

그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책'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으면서 그의 그런 열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젠 그를 진정한 작가인 동시에, 번역가로써 우러를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의 따님, 이다희가 서문에서 밝힌,

때로는 원칙주의자처럼 말을 대하고,

때로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도 하고,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 을

이렇듯 한자리에 묶어 놓은건 우리같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글이란건,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즉 작가와 독자가 있어야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작품도 비슷할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작가 자신에게 너무 낯익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미의식은 편애의 산물일 가능성 조차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을 많이 썼다. 그런 글들을 쓰고 나면 몸(존재리고는 하지 않겠다)이 가벼워지고는 했다. 나는 가사 좋은 유행가 부르기를 지금도 좋아한다. 그런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몸이 많이 가벼워진다.(20쪽)

예를 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어쩌지 못해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글을 읽는 독자가 없다면 그 글은 별반 의미가 없다.

반대로, 읽는 독자가 없는 글이라면, 나무를 베어가며 아깝게 책으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여기서 구분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라면,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라면,

인터넷도 발달하였고 블로그도 활성화되었고,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웬만한 네트워크와 소통도 가능하니까,

책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글을 쓸 수 있고,

글을 매개로 교류와 의사소통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프로의 글쓰기는 글을 쓰고나서, 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자기만족감 말고도,

글을 읽게 되는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어떤 의미와 방향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삶은 나남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남의 삶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나는 가정합니다.

  첫 번째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형'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가 같은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변성'이라고 불러보기로 합니다. 세 번째는 포도주가 그것을 마신 사람 안에서 성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이 되기도 할 때 일어나는 제3의 초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역變易,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이 변역의 특징은 끊임없이 변역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부르는 종교의 가르침이 여러 각도로 달리 해석되는데도 불구하고 연쇄 작용을 통하여 끊임없이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연쇄 작용을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저 사람은 저 사람이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들게 된 화두이자, 나와 남이 지어내는 행위를 평론할 때 자주 써먹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변역의 역사에 가담하는 노릇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69~70쪽)

 

내가 이 곳 알라딘 서재에 둥지를 틀고 글을 올린지도 3년 반 정도 되었다.

이 동네에 있는 숨은 고수들에 비하면 '새발의피'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정도이지만,

내가 이 곳에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깜박깜박 하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순간의 감동을 잊지않고 기록해 두고 싶어서 였고,

좋아하는게 책이다 보니 책관련 인터넷서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곳에 글을 쓰면서 지키는 원칙이 몇가지 있는데,

첫째는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말을 쓰고,

읽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끊어 읽기 단위로 잘라서 문장을 만든다.

 

어법 운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난 책을 낼게 아니고,

그냥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읽기 좋으면 그만이다.

 

또 한가진, 될 수 있으면 평점에 인색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나는 좋아서 책을 읽는 아마추어이고,

책을 낸 사람들은 적어도 직업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나의 평점이 인색하다고 하여 책을 읽을 사람들이 안 읽을 것은 아니고,

책이 아무리 별로라고 하여도 이미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나무로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정 후한 평점이 불편하다 싶으면,

개인적인 감상을 본문에 남기거나, 평점을 남기지 않는 페이퍼로 대신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리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글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그가 구어체 문장을 쓴다는 점이다. 그의 책은 내용이 어려운데도 술술 읽힌다.

ㆍ이런 글을 읽을 때는 속어 비어에 묻어 있는, 쓴 이의 '껍진껍진한 느낌까지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문학동네 바깥사람이었던 조영남 형의 글을 꼼꼼하게 읽는 것은 시종일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문법가들과는 달라서 구어체로 쓰인 문장의 부적절한 표현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어체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는 아닌 것이다.(81쪽)

 

 

그러나 사전도 맹신할 물건은 못 된다.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그 까닭은 이렇다. 사전에 나오는 설명은 개념 이해의 길라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다. 사전적 해석만 좇아 번역한 문장이 종종 죽은 문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00쪽)

이 부분이 내가 이윤기 님을 다시 보게 된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가 아니라는 말.

사전도 맹신할 물건이 못 되고,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라는 부분.

 

평생에 거쳐 연구하고 노력하고,

이제사 그 연구와 노력의 결과물이 하나, 둘 씩 나와줘야 하는데,

그간의 연구와 노력이 아깝고, 안타깝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생각일뿐,

정작 본인은 학자나 연구가, 또는 문장가로써의 삶을 살고자 한게 아니라,

생각이 살아있는 글쓰기, 삶이 녹아있는 글쓰기를 구사하고자 했던 현역 작가이고 번역자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주고 있다는 것은 역자로서는 아픈 일이지만 우리 번역 문화에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철학자 강유원 박사께 나는 아직도 고마워한다.(110쪽)

 

'장미의 이름'관련, 이렇게 출판되어 나와 있는 책을 거둬들이고 다시 번역, 만들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번역가가 잘못을 시인하는 일은,

그가 본인의 개인적인 안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나라 번역 문화의 발전을 생각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하겠다.

이런 일은 '장미의 이름' 말고도, '비밀의 계절'또한 본인이 세월이 흐른 후에 재번역하게 되는데,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과정만으로 높이 살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접은 생각이지만,

한때 장르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장르소설 번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원래의 정서와 감각 그대로 접하고 싶어서 꿈꿨었는데,

그 일의 핑크빛 분홍분홍한 부분만을 생각하고,

숨은 고통과 노력은 바라보지 못했었다.

 

근데, 어떤 번역자는 누가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들이키는것 같이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했고,

또 다른 번역자는 평생 번역 생활에 얻어 가진거라곤 치질과 손가락 관절염이라고 했다.

정말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쓴 글을 어디선가, 누군가 열광을 하며 읽어줄 독자도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외국어 번역 공부, 나는 참 어렵게 했다.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많이 절망했을 뿐, 한 번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많이, 그리고 오래 걸었다. 판화가 이철수는 길을 잃고 오래 걸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수도 있다고 위로하고, 시인 강연호는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격려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들을 때마다 늘 슬프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절망하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학원이라는 데서 몇 달만 수련하면 '초벌 번역'이라는 것으로 수입이 짭짤해질 모양이다. 하지만, 마무리 번역은 누가 하는데?(116쪽)

이렇게 돈 되는 초벌 번역만 하고 끝내라고 해도,

정말 쓰지 않고 못 배길 사람이라면 글의 마무리가 궁금해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음을 알겠기 때문이다.

 

옛날에 전공이랑 관련하여 지방의 단과대에서 한학기동안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여러가지로 힘이 들었지만, 가장 힘이 들었던건,

수업을 하느라고 말을 쏟아내고 나면,

참을 수 없는 결여로 허덕였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들입다파는 걸로 그 결여를 매울 수 있을거라고 착각하곤 했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과 번역의 공통점은,

가르치는 자와 번역자가 중개자가 되어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가르치는 자가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배우는 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마찬가지로 번역자가 번역하는 언어와 번역되는 언어, 둘다를 잘 알고 있어도 독자들이 제대로 알아 먹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이건 소통하려는 의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눈높이에 관한 문제인것 같다.

 

예를 들면, 이윤기는 살아 움직이는 조르바를, 조르바를 춤추게 하기 위하여,

이윤기가 가장 자신 있는 특유의 사투리를 구사하여 번역한다.

조르바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살아나 춤추게는 하였지만,

이윤기가 구사하는 사투리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국의 시골 촌놈으로 재탄생시킨다.

지난해 3월, 가까이 사귀어 모시던 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당신의 소설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당신에게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 당신의 소설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173쪽)

번역이나 소설일때는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는 원칙이 통용되지만,

이런 종류의 글일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윤기의 개성이 잘 살아있는 이런 글들이야 말로 이윤기 님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이윤기는 번역을 하면서 원서를 집어 던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가장 행복해 했다.

 

난 언제 가장 행복한가 돌이켜보니,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읽은 느낌을 그 책을 읽은 또 다른 이들과 공유할때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은 내 몫이 아니지만,

적어도 좋은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공유할 때 난 행복함을 느낀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게 이윤기의 글쓰기라면,

이윤기의 글을 읽고 행복해 할 수 있는 독자인 것이, 오늘 고맙다.

 

춤을 출 수 없어도, 안분지족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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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3-12-05 19:53   좋아요 0 | URL
'춤을 출 수 없어도, 안분지족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지 싶다.'
마지막 이 한 줄에 끄덕이며 공감하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3-12-10 15:40   좋아요 0 | URL
근데 영화를 다시보기 하니, 조르바 댄스 왕 멋진걸요~^^
우리 어깨동무하고 "쉘 위 댄스~?" 흉내라도 내야겠어요, ㅋ~.

2013-12-05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3-12-10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나귀님도 알고, ㅋ~.
이윤기 님의 쪼갬번역 사건도 알고요, ㅋ~.

원래 고민은 웬만하면 기억되지 않는 법이고,
그리고 고인은 웬만하면 말이 없는 법이죠.

실은 저 혹시나 싶어 '장미의 이름' 다시 읽어 보려 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만 기억하고 싶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