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묘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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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었다.

얽히고 섥힌 인디언의 가족사를 내 자신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려 들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지난한 삶이라는 것이,

여러 작가와 언론에서 입을 모아 칭찬하는 아름다운 삶 내지는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가까운 친척끼리 얽히고 섥혀, 이름마저 비슷비슷하여 분간하기 힘든 콩가루 집안의 그것처럼 여겨져서 너무 별로였다.

 

그리하여 내 자신의 가치관을 배재하고 객관성을 유지할 요량으로 한동안 묵혀두었다가 펼쳐보아도 마찬가지인거라...

찬찬히 살펴보니, 내가 이 책에 너무 감정이입을 했었던 것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 하나하나에 너무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하다보니,

또 다른 나인듯 여겨져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이 책을 읽는데는 간단한 준비운동이 필요할 수 있겠는데,

그 중 하나가 인디언 수우 족과 인디언보호구역에 관해서 간단하게 알아두어야 겠고,

다른 하나가 이 책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나처럼 단일민족이 뭐 대단한 것처럼 교육받은 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그 윤리적 기준이나 도덕적 기준이 옳은것처럼 잣대를 들이대면 안된다는 것이다.

모지스 필라저를 사랑한 뒤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옳고 그름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의미의 명암이었다.(106쪽)

항상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지만,

옳고 그름은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의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흑백 논리로 판단할 수 있는게 아니라,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묘하게 속하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래야 기억상실과 관련하여, 증손자와 할아버지의 전혀 상반된 논리로 엮인 다음의 문단이 설득력 있게 된다.

 

어쩌면 기억상실은 그에게 과거로부터의 보호이자 과거의 일로부터 그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그의 시절에 그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멍하니 웃으며, 죄책감도 허탈감도 없이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예컨대 그가 기억하는 준은 그의 입속에 검은 자두를 넣어주던 어린 소녀였다. 그의 기억 속에 그녀는 영원히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의 증손자 킹 주니어는 아직 기억이란 것이 생기지 않아 행복했지만,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어서 행복했다.(34쪽)

 

이 책의 미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문장의 아름다움도 한몫한다.

저자 '루이스 어드리크'가 아름다운 언어와 문장을 쓴것도 물론이지만,

번역도 훌륭하여 그 아름다움을 전혀 훼손시키지 않았다

  나는 약해졌다. 내 생각들은 가엾게도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고통은 나를 강하게 했지만, 그것이 나를 떠나자 나는 곧 잊기 시작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녀가 정말 주전자로 내게 화상을 입혔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해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같았다. ㆍㆍㆍㆍㆍㆍ내 마음이 경첩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며 나 지신의 고통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81쪽)

 

  그녀는 절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아마 내가 자기 얼굴을 보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자리에 앉아 각자 혼자다. 세상 저편으로 해가 지고 언덕에 어스름이 깔린다. 내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은 점점 농밀해지고, 뜨거워지고, 무거워지고, 나는 그녀를 원하지 않지만 원하고, 그래서 잡은 손을 놓을 수 없다. (95쪽)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 하나하나에 너무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하였다고 했는데, 그 중 '가장'은 아무래도 '마리 라자르' 또는 '마리 캐시포' 였다.

어린 시절 하나의 사건으로, 수녀원에서 도망나오게 되고 ,

(입장에 따라서는 무사히 빠져 나온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후로 기도따위는 하지 않던 그녀는 사랑 앞에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 무릎을 꿇는다.

  나는 계속 감자 껍집을 벗겼다. 한 번만 길게 돌려 깎으면 끝이다.ㆍㆍㆍㆍㆍㆍ라드 깡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이 닿기도 전에 알았다. 그애의 검은 구슬목걸이가 거기 있는 것을.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구할 것이다. 내가 성당에 가는 이유는 오로지 늙은 암탉들이 나를 낙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나는 기도하지 않지만 이따금 구슬목걸이를 만진다.

  그것은 비밀이 되었다. 나는 절대 들여다보지 않고, 아무도 없을 때 그저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즐거운 시간이다. 만지작거릴 때마다 작은 돌멩이를 생각한다. 호수 밑바닥에서 파도에 정처 없이 휩쓸리며 반드럽게 깎이는 돌멩이. 많은 사람들은 그 돌멩이를 따스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파도에 깎여 자꾸만 작아지다 마침내 사라지는 돌멩이가 전혀 따스하지 않다.(130~131쪽)

 

ㆍㆍㆍㆍㆍㆍ지금까지 나는 하느님에게든 누구에게든 무릎을 꿇고 기도한 적이 없으니 그날 밤 바닥을 닦은 것은 무릎을 꿇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다. 나는 흐릿한 왁스 자국과 먼지를 문질러 없애면서 기분이 좋아졌고,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남편에게 버림받아도 바닥을 깨끗이 닦을 수 있는 여자가 나라는 사실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예전에 나는 오만했다. 지금 나는 무릎을 꿇었다. 멋진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바닥을 닦았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나 자신을 비웃지 않앗지만 지금은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이 장막을 가위로 잘라버리기로 했다. 그 수녀는 영악했다. 내 약점을 알았다.

  그는 나를 떠났지만 나는 주저앉지 않을 것이었다.

ㆍㆍㆍㆍㆍㆍ

  사랑이 내 고개를 돌려 남편과 라마르틴 여자 사이에 벌어진 일을 보지 못하게 했다. 넥터가 내게 줄 상처가 아직 남았지만, 지금 나는 늙은 암탉들이 수군거릴 일 따위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아프다.

ㆍㆍㆍㆍㆍㆍ

그래서 나는 넥터 캐시포에게 수녀에게 배운 대로 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에 손을 쑥 넣은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팔을 뻗어 힘껏 내 손을 잡자 나는 그를 끌어 당겼다.(213~215쪽)

내가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 하나하나에 몰입하고 감정이입 하였다고 해서,

이 책에 나오는 남자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은 아니다.

난, 넥터 캐시포를...그의 나이듦에 관한 두려움을 몸과 마음으로 격하게 느껴가며 공감하겠다.

  이따금 나는 달아났다. 휴식이 필요했다. 술을 마시러 쏘다녔고 마리는 나를 야멸차게 나무랐다. 몇 년이 지나자 아기들이 걷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다만 아이들이 신을 신발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항복햇다. 말 그대로 코를 박았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고, 고개를 들어 세상이 경이와 창조물을 가득 담고 흘러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백인 농부들의 건초 다발을 묶으며 늙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것에 나는 새삼 놀란다, 사람들이 이미 많은 물이 흘러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세월이다. 급류였나보다. 순식간에 휩쓸어 옆도 보지 못하고 눈앞에 떠밀려오는 것에만 시선을 붙박아야 하는 소용돌이 같은 급류. 십칠 년의 결혼생활, 오기도 가기도 한 아이들.

  그뒤 강물은 고인 느낌이었다.

  어쩌면 흐르는 강물에서 너무 빨리 눈을 뗀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시간의 빠른 움직임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이 일어난 날을 기억한다. 계단에 앉아 망가진 마리의 냄비를 철사로 묶는데 만물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의 함성도 멈추었다. 마리가 바가지 긁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기들은 잠들었다. 소는 여물만 잘근댔다. 개는 뙤약볕 아래 길게 늘어졌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뭇잎도, 종도, 사람도, 소리도 없었다. 공기 자체가 함몰된 것 같았다.

  그 괴괴함 속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본 것은 흐르는 시간, 순간순간이 내 뒤에 쌓이는 장면이었다. 내가 시간으로부터 삶을 쥐어짜기도 전에. 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서 나는 그저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강물이 커다란 바위에 부딪는 것처럼 시간은 내게 득달같이 밀려왔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바위처럼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닳을 것이다. 이미 닳아가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가렸다. 나는 줄었다. 근육도 줄었고, 머리카락도 줄었고, 턱 힘도 줄었고, 허리 밑으로 하던 일도 줄었다. 제안도 줄었다.ㆍㆍㆍㆍㆍㆍ(166~167쪽)

 

나도 우리아들이 열일곱 살이니, 결혼 십칠 년이 되었다.

한때는 시대와 내가 같이 빨리 움직여 멀미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정지는 아니어도 슬로우 모션으로 느리게 동작하고 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휙휙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어, 멀미가 날 지경이다.

누군가는 함몰이라고 표현하는데,

다들 바쁘게 분주히 움직이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으니 삶이 저만치 뒤로 도태된 것처럼 느껴져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육체는 세월에 의해 닳아가고 있다는데 말이다.

 

그런데, 내가 도인이라고 부르는 이가 어느날 이런 말을 해주셨다.

근육도 줄고, 머리카락도 줄고, 턱힘도 줄고, 허리 밑으로 하던 일도 주는 이 일련의 과정들을,

'닳음'이 아니라 '닮음'의 과정이라고 봐도 좋지 않겠느냐?

번지고 스미고 물들어 스스로 '자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 말고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느냐?

그러고 보니, 자신의 내세우고 주장하기에 급급해서는, '닳을 것'도 그리하여' 닮아갈 것'도 없는 것이 맞긴 하다.

 

이것과 상반되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한데,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인 '사람이 나이가 들지, 마음이 나이가 들지 않는다'는 말과 관련하여서도 많은 생각을 해봤다.

 

ㆍㆍㆍㆍㆍㆍ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큰 슬픔과 사랑을 느끼는지 보았다. 그것은 내게 사랑의 체계에 대한 진정한 충격이었다. 나는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면 더 편안해져서, 아파도 많이 아프지 않고 좋아도 그렇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반들반들 닳아 늙으면 잘 알아채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사랑이 쪼그라들다 죽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제 나는 채찍처럼 분연히 일어서는 사랑을 보았다.(297쪽)

이십 대 중반의 나는, 사랑에 서툴렀었다.

하지만, 그때 젊은 날의 사랑은 열정적이고 불같은 반면,

이 글에서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 닳아 쪼그라들다 죽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아빠가 혼자 사시는 것도,

그런 우리 아빠가 아주 자유 분망하게 사시는 것도,

머리로는 알 것 같다고 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나이가 들지, 마음이 나이가 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육체가 닳고 쪼그라 들다 죽는 것일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닳지도, 쪼그라들지도, 죽지도 않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어느 날 나는 하루종일 손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야릇한 감각을 느꼈다. 손의 감각을 타고나면 열망이 당신을 거기로 데려간다. 나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고, 밖으로 나가 둘 중 한명이 죽거나 미칠 때까지 사랑할 여자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따금 나는 누군가의 내면을 훌륭히 치료하지만, 장기전을 하기에는 지구력이 부족한 것 같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려면 그런 지구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자질이 아무 노력없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생각을 다시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로 돌렸다. 할머니의 생각은 내 손과 뒤엉킨 창자로 느꼈고, 할아버지의 생각은 내 정신력으로 느꼈다.(298쪽)

 

신앙은 어리석을 수 있으나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마침내 나는 사랑의 묘약의 진정하고 실제적인 힘은 기러기의 심장이 아니라 치유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313쪽)

오늘,

내가  슬픈것은 나이가 들고 육체가 닳고 쪼그라 들다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마리 라자르' 또는 '마리 캐시포'처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이 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부분이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문맥의 흐름 상 상관 관계가 모호한 것 같아 딴지를 걸어본다.

 

"ㆍㆍㆍㆍㆍㆍ.악어거북은 멍청하기 짝이 없어서 머리가 잘려도 살아 있잖아요."

ㆍㆍㆍㆍㆍㆍ

"그건 멍청한 게 아니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놈들은 심장에 있단다. 너처럼."

  나는 고개를 들었고, 내 심장정신 사이가 끊어진 것을, 그리고 어떤 끔찍한 사실을 조만간 알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321쪽)

 

  내 생각에, 눈을 뜨고 있을 때는 괴로워서 자꾸 미루게 되는 어려운 결정은 실컷 자고 나서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다음 날 깨자마자 나는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지난주에 나는 겸손해졌는데, 손의 능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내게 계속 머무를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가슴이 어디 있는지 깨달으면 삶이 다르게 느껴진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시력이 나빠져 괴로웠고, 노인주택에 말없이 앉아 인간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시야도 더욱 안으로 향해 결국 바깥 세상에는 완전히 눈멀게 되는 기분이었다.(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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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0-02 07:00   좋아요 0 | URL
스물에는 스물다운 사랑이고
서른에는 서른다운 사랑이며
마흔에는 마흔다운 사랑이라
쉰 예순 일흔 여든에는
또 그 나이에 걸맞게 아름다운
새로운 사랑이 빛나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