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정호승 시집 창비시선 36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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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나 '휴일'만 되면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는 사람을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일이나 휴가라고 하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고 방에 콕 처박혀서 지내는 '방콕'족인 내가,

그들과 다른 종족인 것은 부인하지 않겠지만...백번 양보를 하여도,

여행이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 잠을 자다, 잠시 머무르다'는 '쉬다'의 뜻에 부합된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말이다~--;

하여 내게 여행은 '휴가'와 어울리지 않는, 아니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고도의 '노동'쯤으로 간주됐었다.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 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 뿐이다

 

하여 시를 해석하거나 이해할 깜냥이 되지 않기도 하지만,

'여행'에 관한 시는 그런고로 더 더욱,

그냥 느낌만으로, 아니 내 맘대로 해석하곤 했었다, ㅋ~.

그러니까 일이 됐든, 유람이 됐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나가는 일을 '여행'이라고 부르는 취지대로라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그것은 무장해제 하지 못하는 고로 제대로 된 쉼이 될 수 없을테고,

그런 논리대로라면, 무장해제를 해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마음 속만이,

사람의 그런 '외로운' 마음 속만이 '오지'이고 '설산'이고 간에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등단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낸 시집이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지만, 강산이 네 번 바뀔 정도의 세월이어서 그런지,

'변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시는 많이 변했다.

처음엔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불을 피우면 따뜻해진다며 '서울의 예수'를 읊조렸고,

한동안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했었던 그가,

어느날보니 운주사의 '풍경'을,

또 어느날 보니 '미륵불'을,

또 어느날 보니 '성체조배'란 시를 만들었다.

사실 종교색의 변화라고 보면 놀라운 일인데,

그가 말하는 여행은 아무래도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특정종교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부활'이나 '해탈'을 얘기하는 듯 하여 숙연해진다.

 

번지고 스며 물들어 서서히 자연으로 영입되는 거 같다.

점묘법으로 나타내보자면,

진하고 촘촘하고 사람의 형상을 했던 점들이 연하고 성글어지지만,

그래서 사람의 형상으로는 흩어지는 거지만,

자연이나 바람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자연과 바람의 본성에 가까워진다고 해야할까?

'적멸에게'나 '차나 한찬'이라는 시를 보면 더 그런 느낌이 선명해진다.

寂滅(적멸)

자연()히 없어져 버림
불교()에서, 번뇌()의 경지()를 벗어나 생사()의 괴로움을 끊음, 죽음, 입적(), 열반()

적멸에게

 

새벽별들이 스러진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별들은 스러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이제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제 다시 보고 싶은 별빛도 없다

아지랑이 이는 봄 하늘 속으로

노고지리 한마리 한순간 사라지듯

삼각파도 끝에 앉은 갈매기 한마리

수평선 너머로 한순간 사라지듯

내 가난의 적멸이여

적멸의 별빛이여

영원히 사라졌다가 돌아오라

돌아왔다가 영원히 사라져라

 

 

차나 한잔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

눈을 없애고

찻잔에서 우러난 작은 새 한마리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곡우를 몇십년 지나는 동안

찻잎 한번 따본 적 없고

지금까지 우전을 몇천년 만드는 동안

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

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

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

마침내 귀를 없애고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

홀로 잠들어라

 

배반

 

심년동안

꽃 한번 피우지 않은 춘란을 뒤산에 버렸다

더이상 배반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 한번이라도 꽃 피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나

기도는 언제나 나를 배반하고

나는 언제나 기도를 배반했다

그래도 혹시 내가 춘란을 배반한 게 아닌가 싶어

며칠 뒤 봄비가 그친 뒷산에 올라갔다

깨어진 화분 틈으로 춘란이 허옇게 뿌리를 드러낸 채

꽃을 피우고

저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파리

 

한마리 파리도

푸른 하늘을 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흰 구름을 사랑할 때에도

한마리 파리가

푸른 하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마리 배고픈 파리가 밥상 위에 날아와 앉는 것은

한 그릇 밥의 거룩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뿐

파리를 내리치는 파리채여

파리채를 손에 쥔 인간의 손이여

멈추시라

파리도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기뻐하며

새처럼 나뭇가지에 앉아 밤하늘 별을 바라볼 때가 있다

인간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인간일 뿐

인간이 지니지 못한

날개를 지닌 파리는 자유롭다

 

'배반'이나 '파리'라는 시는 '인간중심' 또는 '자기 본위'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따뜻한 나라,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들은 나름 행복하게, 삶을 즐기며 잘 살고 있는데...

우리보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불쌍하게 생각하고 눈물바람을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완전 내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과연 상대방을,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내 마음대로,

내 식대로,

날개를 꺾어 내 곁에 붙잡아두려 했었던게 아닌지 반성해보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나에 맞게 변하시키는게 아니라,

내 스스로 변하여 상대방에게 닮아가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방점은 '변하여'나 '상대방에게 닮아가는 것'에 아니고,

저 말 속에는 숨어 있지만,

'본성'이라는 말에 찍혀야 한다.

 

더우기 꽃처럼 한철만 보고 말것이 아니고,

사람은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오래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오래가기 위해선, 오래 남기 위해선,

모든 고전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렇겠듯이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편해야 한다.

본성이라는 말 속에 숨은 자연이나 편안함 따위의 말을

느끼겠긴 하겠는데,

잘 설명을 못하겠는게...나의 한계이다~--;

지금은 좋기만 하고 그러니까 나를 꾸미거나 치장해서라도,

잘 보이고도 싶고, 잘 하고도 싶고...하겠지만,

세월이 흐른뒤에도 그런 초심을 똑 같이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성은 초심에 대체될 수 있겠다.

얼마전에 읽은 박웅현은 그걸,

적어도 5년 뒤에도 기억될 수 있느냐 라고 표현 했는데...

난 몇년이라고 해야 할까?

변덕이 죽 끓듯하고, 싫증을 잘 느끼는 나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성체조배

 

꽃이 물을 만나

물의 꽃이 되듯

물이 꽃을 만나

꽃의 물이 되듯

 

밤하늘이 별을 만나

별의 밤하늘이 되듯

별이 밤하늘을 만나

밤하늘의 별이 되듯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내가 되듯

당신이 나를 만나

나의 당신이 되듯

 

그런 의미에서 '성체조배'라는 시가 참 좋았다.

나나 상대방을 억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이심전심, 물아일체를 통한 부활이나 해탈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느낌이다.

내가 여기서 상대를 物로 표현했다고 하여,

사물로 낮추여  평가하는게 아니라, 나와 동격의 그것으로 본다는 걸 의미한다.

나나 인간이나 사물이나 나름의 '본성'을 지닌,

나름대로의 의미와 쓰임으로 존중 받을 대상이라는 거다.

 

또 한가지,

요즘은 책 말고 경험의 중요함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책에서 얻게되는 단편적인 지식말고,

몸소 체험하고 경험하여 얻게 되는 그것들이 내게 다른 깨달음을 준다.

손에 대한 예의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번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인 두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손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직업이고,

그래서 손을 좀 아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시는 노동의 신성함 내지는 숭고함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먼저,

내 손에 쥔것을 버려야만,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내미는 손을 맞잡을 수도 있다는 걸,

경험으로 깨닫게 해준다.

 

체험이나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책은 우리를 이끌어주는 스승이 될 수 있고,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만 책을 쓰다듬는 손이 경건할 수 있다.

 

그동안 그의 시들을 읽으면 사랑시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인간'에만 국한된 것 같았다.

근데 요번 시집의 그것은 참여시까지는 아니어도,

시 하나 하나가 체험의 산물인듯 하다. 

사랑의 대상이 삶과 경험과 체험과, 그리하여 자연 전반으로 확대된 느낌이다.

 

다른 시들도 하나같이 좋다.

그냥 쉽게 읽어도 좋고,

깊이 곱씹어가며 아껴 읽어도 좋다.

 

묻지 마라 왜 사랑하느냐고 다시는 묻지 마라

바람인 나는 혀가 없다

                               ('바람의 묵비' 일부)

 

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지 않고 어떻게 해가 뜨고

지지 않고 어떻게 너를 이길 수 있겠느냐

아무리 바빠도 아들아

오늘은 변산 앞바다에 떠오른 일몰의 연꽃처럼 왔다 가라

직소폭포 물소리에 한쪽 귀라도 씻고 돌아가라

가다가 격포 채석강 붉은 절벽에 매달려

만권의 책을 꼭 읽고 가라

                                                       ('변산에서 쓴 편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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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07-01 19:30   좋아요 0 | URL
정호승 선생은 늙지도 않아요. 그이 인생의 그 무엇이 평생을 저토록 애닯고 애탄하고 목 마르게 사랑을 구하고
초월 욕망에 시달리고 갈급하게 하는지 예전부터 궁금했어요. 그래서 시인인가? 저도 이 시집 구입해야겠네요.

숲노래 2013-07-01 21:37   좋아요 0 | URL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그 모습 그대로'를 좋아하니까,
서로서로 '서로 모습 그대로'를 닮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