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
강신주 지음 / 태학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난  공자와 맹자를, 노자와 장자를 묶어서 배웠었기에, 

강신주와 지승호의 인터뷰집,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장사상이라고 하는데 익숙했었기에,

노자와 장자를 몇사람 번역본으로 접하고는 두루 섭렵했다고 만족했었다.

강신주와 지승호의 인터뷰집에서 슬쩍 맛보기로 접하고는 의아했었고,

이 책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을 읽고는 허를 찔린듯 공허하다.

노자와 장자의 그것을 같지 않다고 하여 분리하여야 한다고 하는것도 의외였지만,

장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동안 장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뚫어야만 한다는 게,

더 그러하였다.

섣불리 알고 있는 것보다, 백지의 상태가 장자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소리와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암튼 산다는 것을, 나이먹으며 산다는 것을...주체성, 자아를 확고히 하는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소신껏 흔들리지 않으며 주관을 갖고 사는 것을 불혹(不惑)의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어떤 외적 요인들로부터도 견고한, 나만을 방어하는 벽을 철옹성같이 높이 쌓아올리고는, 그것을 자존감 내지는 자긍심이랑 혼동하였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자아 내지는 자의식을 확고히 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좋은 방향이건 나쁜 방향이건 간에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는 고착으로 이어져, 우리의 삶을 부자유스럽게 한다는 것이 장자의 진단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통용되는 장자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뚫어야만 한다는 거다.

장자의 것으로 알고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거나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주장은,

장자의 것이 아니라 <외ㆍ잡편>을 쓴 장자 후학들의 사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장자 후학들의 사상을 뚫고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오롯한 장자의 그것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러고보니, 그동안의 나는 벽을 높이 쌓아올리고는,

외부와의 단절을 내 스스로 만들어 내놓고는 '외로워, 외로워~--;'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거다.

 

한 친구와 친해지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한 친구이지만, 그 친구와 친해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동안 난 낯가림이 심하다는 핑계로, 사람을 좀 가렸었다.

나도 모르는 새,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는...안에 들이고 밀쳐내고 했었던 터라,

그 잣대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이댈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선입견이나 편견은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보고 들은 것을 기억을 되살려가며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되지 않도록,

그때 그때, 몸의 모든 공감각을 이용하여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기준과 잣대를 허물어 버리니, 나에게도 변화가 생겼는데...

정들고 익숙한게 좋다면서 습관이나 타성에서 죽어도 탈피하지 않을 것 같이 굴었었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낯설고 새롭고 두려웠지만,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그동안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지극히 자기본위의, 소극적인 행위라는 걸 깨달았다.

상대방을 대할 때는 '상대방이 대접받고 싶어 하는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는게 옳은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했던 그 임금님을 제대로 해석하기 어려워진다.

 다시말해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새를 대접했으니 어떻게 그 새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그 새는 죽고, 그도 다시는 그 새를 보지 못하게 되어싸. 이처럼 그가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새라는 타자와 관계 맺은 결과는 비참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경우 새는 타자라고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새는 새 자체로서의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투사된 외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ㆍㆍㆍㆍㆍㆍ여기서 새를 기르는 것으로 새를 기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새와 소통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소통을 통해서 새로 상징되는 타자와 어울리는 새로운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94쪽)

이처럼 만일 타자를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 타자와의 공생의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타자성에 근거해서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주체와 그 타자를 삶의 짝으로 받아들으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96쪽)

때문에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 문장의 참뜻은 易地思之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 정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朝三暮四의 원숭이를 키우는 '저공'의 경우도...

간사한 잔꾀로 상대방을 속이려는 술수의 대가로 바라보기 보다는,

상대방과 소통을 꾀하려고 시도한 갸륵한 인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 된다.

 

포정과 소의 만남 또한 마찬가지이다.

포정이 아닌 다른 도살자가 잘랐으면 다른 자연스런 길이 생길 수도 있었고,

포정이었으되, 또 다른 소를 잘랐다면 소의 결은 다르게 드러났을 것이다.

 

『제물론』편에 나오는 "길은 걸어간 뒤에 생기는 것이다(道行之而成)"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다.

걸어간다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길이고 뭐고 간에, 생길 일이 아닌 것이다.

 

이쯤되고 보아야,

장자가 하려는 말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거나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 정도의 자연스러운 것도,

마음의 수양만으로 모든것이 해결되리라는 낭만적인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생이라는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닌데...

옛 책이나 글, 종교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자연스러운 것이나 정신 수양 또는 마음 수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것처럼 읽힌다.

 

때로 번짓수를 잘못 찾았을 경우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 성심(成心)이라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을 동시에 해치는 양날을 가진 칼이란 걸 깨달아야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건...

그리하여, 나의 적극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요구하는...내가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

상대방에 맞추어 나를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나의 행동 철학이다.

 

세살 버릇 여른까지 간다는 말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나를 둘러싼 벽이 두껍고 높아져서...

나를 깨고, 해체하고...

상대에게 맞추어 소통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깨고, 해체하여...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고 소통했을때,

비로소 알을 깨고 나온 아프락사스 마냥 제대로 된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이 들어 나를 깨부수고 해체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힘들지만, 설레인다...ㅋ~.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신 나고,

날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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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6-20 02:08   좋아요 1 | URL
오, 아, 감탄사와 끄덕임만 연발하네요

오랫만에 서재 왔는데 님이 계셔서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 2013-06-20 23:34   좋아요 1 | URL
아우~~~~, 반가와요.
와락~~~~~~^^

날 더운데 똘똘이랑 이쁜이랑 알콩달콩 잘 지내시죠?
저도 님이 거기 그렇게 게셔서 참 좋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