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예수나 기독교를 인식하게 된 것은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가 시작이었나 보다.

시 속에서,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라고 읊조리고 있는데...

나는 어린 나이에, 모든 예수나 기독교는 저 시 속에 등장하는 예수 같은 줄 알았나 보다.

그랬으니 종교로서의 기독교,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지지고 볶는 삶 자체로, 내지는 연장선 상에서 받아들이려 했었을 테고 말이다.

암튼, 내가 정호승의 저 시집을 읽었을 때가 스물 언저리였고,

그로부터 그때 그 나이만큼의 세월이 흘렀고,

저 시 속에 등장하는 예수가 이제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걸 믿어가려던 찰나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사는 세상 어디에서나 잠시 모닥 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것'을 희망해도 좋으려나?

부질없는 희망,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예수가 있었으니 반드시 '(당신들의) 기독교'가 필요치 않으나,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 불과한 신자가 아니라 제자의 길, 그러니까 어렵사리 몸을 끄-을-고 남을 따르려는 삶의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자란 '타자성의 소실점을 향해 몸을 끄-을-고 다가서는 검질기고도 슬금한 노력'입니다. 쉽게,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고쳐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이카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 떼처럼 번성합니다. 이제 '신자'의 파리 떼와 그 파리대왕들의 틈 속에서 유일한 가능성은 '제자'이지만, 아,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그 스승을 '믿지' 않은 채 그보다 앞서 '걸어가는' 공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5쪽,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은 그동안 김영민의 전작들을 읽어 김영민의 논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커다란 제목 '당신들의 기독교'와 목차, 소제목들만을 훑어보고 책의 내용을 대충 미루어 짐작하는 사람들은 낭패를 볼 수도 있겠다.

물론, 큰 제목과 목차, 소제목 등 모두 다 잘 뽑은 것은 맞지만,

큰 제목 '당신들의 기독교' 아래 엮인 10개의 소제목이 어떤 서술도 없기 때문에...

그냥 그렇고 그런 구태의연한 내용이겠거니 하다가는 허를 찔리는 꼴이 되고 만다.

 

이책을 끝까지 차근차근 읽고 나야,

비단 '예수'나 '기독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쪽으로 시야를 확장시킬 수도 있고,

'기독교' 대신에 여타 다른 종교나 각자가 맹목하는 '철학적 신념'을 대입시켜 볼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말이다,

이 책에 나온 10개의 예시 중에 난 저 시집에 나왔던 예수의 실재(實在)를 본 것도 같다.

그러니 이 책 '당신들의 기독교'를 읽고,

'사람사는 세상 어디에서나 잠시 모닥 불을 피우면 따뜻해지는 것'을 희망해 보게도 된다.

 

좀 길지만 부분, 옮겨 보겠다.

j는 기독교인이다. 스스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그리 밝힌 까닭에 그를 기독교인(개신교인)이라 여기긴 해도, 체계가 승인하는 '사회적 동화(social assimilation)'의 지표에서 보자면 j를 굳이 종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좌표는 희미하다. 우선 그는 정한 교회를 두고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는다. 전라도의 외진 향리에 거처하는 j는 전형적인 농사꾼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눈매가 맵고 말씨가 담담해서 선비풍을 짐작할 수 있는 데다가 일없는 날에는 정갈한 한복을 입은 채 매양 책을 읽고 앉았으니 마을에서는 그를 일러 '농사(農士)'라고 추켜주곤 하였다. ㆍㆍㆍㆍㆍㆍ그가 유독 골독하는 책은 신약성서인데,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지만, 마치 신약성서의 원어가 한글이기라도 한 듯이 ㆍㆍㆍㆍㆍㆍ일견 다석 일파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언젠가 나는 j의 글과 그 필체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얼핏 초등학생의 글씨를 방불케 해, 비록 잠깐이었지만 지역의 근면하고 학식 있는 처사로 고명한 그에 대한 기대가 일순간 허물어지는 듯도 하였다. 물론 '박필이 천재'라고도 하고, 심지가 곧고 깊으면 오히려 그 겉가량이 어렵기도 하다.

ㆍㆍㆍㆍㆍㆍ

덕망과 재식을 갖춘 지역의 처사인 j는 유능한 지관으로도 이름을 얻었는데, 특히 동기감응설에 근거한 음덕풍수는 기독교의 교리와 양립할 수 앖는 이치를 지녀, 인근 주민들의 상사(喪事)에 도움을 주고자 한 데서 비롯한 선의가 그가 충실히 섬기는 교회의 적의로 되갚음을 당하는 꼴이 몇 차례 있었다. 이웃의 요청에 응해 그가 지관 행세를 할 적마다 손바닥만 한 마을에 소문이 흐르는 게 당연해서 그가 종종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거나 징벌적 교도의 메시지를 보내곤 하였다.

 

j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람살이'인데, 거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풍수를 비롯하여 지역의 민속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더러 과감하게 지원하는 이유도 '지금-이곳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그의 일관된 '세속적'관심 - 이것은 가히 사이드(E.Said)를 따라 '세속적 관심'이라고 할 만하다-때문이다. 대개의 종교가 '어느 먼 곳'이나 '어느 다른 때'의 유토피아를 명분으로 내거는 대신 지상의 삶을 부차적으로 폄하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j의 개신교는 차라리 일종의 '삶의 종교'-니체가 기독교를 '삶을 고사시키는 종교'로 타매한 점에 착안한다면-로서 그의 일탈적인 행위 속에서 역설적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j가 기성교회와 불화하는 부분은 교리적 각론이라기보다 사실 어떤 총체적인 '분위기'에서 더 깊어진다. 한결같이 양복에 넥타이를 맨 인간들 사이에서 강기갑 의원이나 처음 등단한 유시민의원의 입성이 되려 낯설게 보이듯이, 일할 때가 아니면 늘 정갈한 한복을 챙겨 입고 입을 열면 동아시아의 고전에다 한시를 주워섬기며 좀처럼 개신교회에서 통용되는 어휘들에 마음을 열지 않는 j의 동태에는 마치 눈엣가시처럼 여타의 교인들과는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이물감이 있었다.

 

나는 종교의 완성-종교는 결국 믿는 자의 일생에 근거한 한시성과 실존성에 제한적으로 유효하므로 '완성'이라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이 어떤 정서와 분위기에 젖어 있는 생활양식, 그리고 그 생활양식에 의해 검질기게 몸을 끄-을-고 다가서려는 어떤 희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리라고 전망한다.ㆍㆍㆍㆍㆍㆍ마치 못난 인간들이 못난 신을 제 꼴처럼 품은 채로 역시 못난 생활과 못난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거꾸로 좋은 사람들의 좋은 생활과 좋은 희망은 종교를 완성하고, 그 속의 신을 아름답게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26~133쪽.'j혹은 창의적 스캔들'부분 인용)

 

또 다시 5월이다.

이땅의 꽃들이 피고 지는,

이 땅의 숨은 넋들이 피어나고 스러지는 5월이다.

'예수'나 '기독교' 자리에는 어떨지 몰라도,

저 시의 '예수'나 '기독교'에는 '사람'또는 '삶'을 대입시켜도 좋겠을 5월이다.

 

적어도,

나는 '신'이나 '신성' 대신에 '지금-이곳의 삶'을 대입시키겠다.

때문에 가장 신적인 것은 가장 육체적인 것이라는 얘기도 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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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5-01 21:56   좋아요 1 | URL
5월 한 달도 즐겁게 누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