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이 있었다.

미안하다고는 해야겠는데 말은 안 나오고,

코 밑에서 알짱거리면서 엉뚱한 일로 딴지를 걸면서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사람 좋게 '헤헤~'거리면서,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고 할 태세였고,

이래저래 어쩔 줄 몰라하는 날 향하여,

급기야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음 다 보인다'고 하는 '관심법'까지 구사하는 거다.

아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그래...

내가 미안해서 쩔쩔매는 것을 모르나 싶은 것이 서운하여,

나무들 사이에 있을땐 숲을 볼 수 없다며 툴툴거리게 되었다.

그러자 나무를 많이 심다보면 언젠가는 숲도 보이겠지라며 또 '헤헤~'거린다.

 

 

 

 

 

 

 

 

 

화담집
김교빈 지음, 서경덕 원작 /

풀빛 / 2011년 12월

 

 

그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청소년 철학창고'라는 부제를 단 <화담집>이었다.

그동안 화담 서경덕을 황진이의 요망(?)을 이겨낸 군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

성리학의 최고봉이나, 이기론의 중심 사상가 등을 외울때 서경덕을 제일 먼저 외웠으면서도...

한번도 그 서경덕으로 연관시켜 생각하지는 못 했었다.

때문에 황진이가 그토록 연모하고 어쩌고 하여도,

송도3절 어쩌고 하여도,

그런가보다 했을뿐 그토록 훌륭한 인물인지를 놓고는 심사숙고한 적이 없었다.

 

실토하자면...

옛날에 두꺼운 하드커버의 '화담집'을 한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채 본문을 들추기도 전 서문의 빽빽한 한자에 기가 죽어, 하품만 하다가 덮었었다~--;

그동안의 책들에서 서경덕은 둔갑술이나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선이나 도인쯤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이 책에선 인간 서경덕이 등장해서 좋았다.

 

어찌되었건, 인간이라고 해야 그의 심오한 학문세계를 가히 범접해 볼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인간적이라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훌륭한 군자일지라도...

그도 성리학자이기 때문에 성리학적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구태의연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지고 볶더라도 구태의연한 가운데 좀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게 좋지,

가끔 신선이나 도인이 부럽고 좋아 보일 때는 있겠지만,

신선이나 도인을 닮고 싶지도,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동안 내게 이와 기의 개념은 좀(=very much) 어려웠다.

기는 리와는 달리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는 바탕이며 리와 기는 한 사물 속에 같이 들어 있다.(25쪽)

 

그러니 이와 기를 자유자재로 운용, 구사해야 하는 태극과 태허 개념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태극이 우주만물의 변화를 설명하고, 주역이나 우리나라 국기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성리학 전반에 걸쳐 두루 쓰였다면...

태허는 성리학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개념으로, 장자가 가장 최고의 경지로 말한 절대 자유의 개념이란다.

하지만 서경덕은 모든 만물을 의 변화로 설명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성리학에서 가장 궁극의 이치라고 생각하는 태극보다는 최고 변화의 경지인 태허를 중요 개념으로 삼았다.

오히려 태극을 사물의 변화 속에 담긴 변화의 궤적 정도로 낮추어 보았다.

서경덕의 관점은 도교나 불교의 관점과 다르다.그는 비록 자연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장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도덕을 강조하는 유학자였다. 다만 일반 유학자들과 다른 점은 '내면을 닦는 공부'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공부'가 학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에서 공(空)을 강조했지만 서경덕은 빈 듯해 보이는 '공'도 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봄으로써 존재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자 했지만 그런 힘 또한 장자가 아닌, 맹자가 강조했던 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도덕적 용기)에서 온다고 보았다.(58쪽)

 

암튼 서경덕은 어렸을때부터 남달랐나 보다.

열네 살때 <서경>을 배웠는데 그 다음 해까지 300회를 읽었다고 하고,

열여덟 살때 <대학>을 읽다가 "앎을 완성하는 것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깨닫는 일에 있다."라고 한 문장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먼저 사물의 이츠를 궁구하지 못한다면 독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하고 

날마다 책상 앞에 사물 이름을 한 가지씩 써 붙여 놓고 그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94쪽)

 

서경덕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올린 인물이 있는데, 바로 이현주 목사님이다.

이현주 목사님의 <사랑 아닌 것이 없다 - 부제;사물과 나눈 이야기 >를 읽었던 터였는데,

그때는 많은 부분이 서경덕의 그것을 차용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 이옥의 글들을 읽다가...

과거 내가 열광했던 김탁환의 미문들이 이옥의 그것이란걸 알았을 때의 배신의 충격이랑 흡사 맞먹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서경덕의 그것은 이황의 그것과는 명맥을 달리, 이이의 그것과는 명맥을 같이 하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것을 배워서 새 것을 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허는 빈 듯하면서도 비어 있지 않으니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빈 것 같은 기이다. '빈 것'은 끝도 없고 무한히 펼쳐져 있으므로 기 또한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 이미 '빈 것'이라고 해놓고 어째서 기라고 말하는가? 빈 듯하면서 고요한 것이 기의 본모습이고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기의 작용이니, '빈 것'이 비어 있지 않은 것임을 안다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노자가 "있음이 없음에서 나온다."라고 한 것은 '빈 것'이 곧 기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또 "빈 것이 기를 만들어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틀렸다. 만일 '빈 것이 기를 만들어낸다.'라고 한다면, 바야흐로 아직 아무것도 생기지 않앗을 때는 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빈 것'은 죽은 물건이 된다.

  이미 기가 없다면 또 어디에서 기가 생길 것인가? 기는 시작이 없으니 생겨남도 없다. 이미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겠는가? 이미 생겨남이 없는데 어떻게 없어짐이 있겠는가?

  도가에서는 허(虛)와 무(無)를 말하고 불교에서는 적(寂)과 멸(滅)을 말한 것은 리와 기의 근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어찌 도를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78~79쪽)

 

이 책을 읽으면서 멈춰서서 깊이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서경덕이 개성 국립학교 선생으로 와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대관자(大觀子) 심의에게 준 송서(送序)를 읽으면서 이다.

서경덕은 말처럼 가난하여 다른 선물을 줄 길이 없어서 《주역》을 읽다가 떠오른 글자 멈춤(止)에 대한 생각을 선물로 준 것이다.

글자를 선물로 준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그토록 가난한 비참함이 될수도 있는것인데...

그걸 선물로 줄 수 있는 마음과 받을 수 있는 마음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 마음만으로도 천하를 모두 얻은 것보다 호기롭고 넉넉할 것 같다.

 

서경덕의 그것이 그간의 것들과 다르게 와닿은 까닭은,

글자 멈춤(止)에서 사물의 사물됨이나 사람의 도리를 읽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서경덕은 그의 좋은 점을 높이 사면서도 "머물 만한 때면 머물고 갈 만한 때면 간다." 라고 했던 《주역》의 가르침을 끌어와서 벼슬이든 시 쓰는 일이든 자연의 법칙에 맡기라고 하고 있다.

 

태극과 태허도 그렇고,

글자 멈출 지'止'도 그렇고,

관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말들이다.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서 의미가 상반될 수도 있겠다.

이럴때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사람의 관점을 욕심내거나 탐내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고,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만 여기에 머물고 안주하느냐,

도움을 받아,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느냐, 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하겠다.

관점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로는 책, 벗, 스승 등이 있겠다.

 

실토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불교나 도교적 얘기도 아니고, 성리학적 얘기도 아니다.

어떤 종교적 관점들을 통하여 예측하게된 미래를 놓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또는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닦아 가는데 있다.

 

  '기자이(機自爾)'란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꽃 필 때 되면 꽃이 피고 바람 불 때가 되면 바람 불며, 배고플 때가 되면 배가 고파 오는 그런 계기의 변화를 뜻한다.(74쪽)

 

태극과 태허를 얘기할때도 그렇고,

글자 멈출 지'止'를 얘기할 때도 그렇고,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를 얘기할 때도 그렇고,

관점과 기준이 되는 그 '무엇' 또는 그'누군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내게 그런 역할을 하는 이가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누군가'라는 거다.

 

때로 관점을 갖고 고민하게 될때,

누군가와 한편인가를 놓고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게,

그 누군가를 내게 거울인양 비추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합집합, 교집합, 부분집합의 빗금으로 나타낼때 마냥...

자연스럽게 나와 누군가를 제외한 나머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선비들이 왜 거문고를 가까이했는지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됐다.

선비들은 늘 거문고를 가까이했다. 그 까닭은 거문고가 한자로는 금(琴)인데, 그 발음이 잘못된 행위를 삼가한다는 뜻의 금(禁)과 통하기 때문이다.

  먼저 앞의 두 시는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이고 뒤의 두 시는 줄 있는 거문고에 대한 이야기다. 줄 없는 거문고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줄은 소리를 내는 도구다. 하지만 소리를 통해 듣는 것보다 소리 없음을 통해 듣는 것이 한 단계 위다. 이는 글자를 통해 써진 의미를 보지만 글자의 조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들 속에 담긴 의미를 보는 것과 같다.

더불어, 소리를 통해 듣는 것과 소리 없음을 통해 듣는 것에 대해서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때론 소리와 소리 사이의 적막도 의미 있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요즘은 사물의 중심을 일부러 살짝 흩고, 어질러 놓는다.

그렇게 하여, 무게 중심을 바꾸게 되면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무엇 하나 사소하고 소홀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럴거라 믿는다.

나무를 많이 심다보면 언젠간 숲도 보이겠지~.

 

  

 

   청소년 철학창고 세트 - 전30권
   플라톤 외 지음, 송재범 외 옮김 /

   풀빛 / 2012년 3월

 

 

이 시리즈의 책은 '근사록'에 이어 두번째인데, 가볍고 이해하기 쉽다.

단점이라면 한자가 병기되지 않아서 의미가 모호한 경우가 있다.

화담집은 '김교빈'님의 풀이가 단연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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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2-08-24 18:58   좋아요 0 | URL
오늘은 좀(very much) 어려운 내용이군요.
무식한 저로서는 도무지 따라잡기 어렵사옵니다.
언급하신 이현주 목사님의 책은 저도 살짝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저 옛날 서경덕 조상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다 이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배운 게 조금(a little) 있는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