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전도연과 박신양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약속'을 보면서 이런 대사들에 감동 받았었다.
男 - 박신양의 대사 ;
"당신께서 저한테... '니 죄가 무엇이냐' 고 물으셨을때...
이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게...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女 - 전도연의 대사 ;
"다른여자 만나는 것만이 배신이 아니야. 니 맘속에서 날 재껴놓는것도 나한텐 배신이야."
그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고...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는 게 꼭 짬뽕공 같은 나답게, '남자랑 여자랑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도 참 다르구나'하는 생각도 했었다.
남자는 직접적인 만남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홀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는 걸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하는 반면,
여자(라고 해서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는 직접적인 만남(뿐)이 아니라,
맘속이라고 표현되는 정신적인 것- 이를테면 우선 순위에서 재껴놓음도 사랑에 포함시킨다.
나도 여자인지라, 남편이랑 이런 문제로 가끔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곤 하는데...
남편은 내 몸이 자기 시야 사정권 안에 있으면 마음이 어느 하늘 밑의 누군가를 절절하고 진하게 찾아 다녀도 개의치 않는 반면에,
난 남편이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내 남편이 아니라는 마인드로 살아서,
몸은 방치하는 대신(방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관리하기엔 내가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마음은 한번씩 확인사살하고 단속 들어가 주신다.
유럽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고딩 때의 첫사랑과의 안부메일을 갖고 난리블루스를 췄던 기억이 있다.
애도예찬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5월
난 그동안의 예찬 시리즈를 김화영님이 번역하셔서 접하게 되었고,
이 책도 그 연장선 상에서 구색맞추기로 갖추게 되었다.
손에 넣고 보니 이번엔 번역본이 아니라 왕은철님이 직접 쓰셨는데,
이 분을 난 '천개의 찬란한 태양','연을 쫒는 아이','위대한 유산'등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번역하신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번역 말고 당신의 필력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나를 이 책 '애도 예찬'으로 이끌었는데,
작가로서의 필력 또한 역자로서의 그것 못지 않아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을 분더러 깊이 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애도(哀悼)'라고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그렇다면 언젠가 때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저자 왕은철님의 경우,
어머니가 조금씩 편찮으시게 되면서,
다른사람들은 어떻게 애도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애도의 관점에서 볼때 문학은 풍요로운 창고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애도하는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양한 문학작품에 형상화된 슬픔과 애도의 방식을 살피는 건 어쩜 당연한 수순이지 싶다.
(물론 이런 분들 덕에, 우리 같은 凡人들은 숟가락 하나만 갖고 달려 들면 되는 거겠지만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성 같은 속성을 지녔지만, 애도 또한 그렇다.
떠나간 사람을 잊고 극복함으로써 새 삶을 사는 것이니까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떠나고 없는 사람을 마음이나 기억 속에서까지 말끔히 비워내는 것이니 어찌보면 '비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저자는 은근 애도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낭만주의자가 아닌가 싶다.
데리다의 '애도'를 힘주어 인용하는가 하면,
데리다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도는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고, 그래서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해야, 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의 시작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거기 나오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으로 장식한다.
히스클리프를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캐서린("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늘 내 마음속에 있어. 내 자신이 늘 나를 기쁘게 하지만은 않듯 그가 꼭 기쁨이 되지는 않아도, 그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해")에게는 그와 같이 놀지 말라고 하고,ㆍㆍㆍㆍㆍㆍ'정상적인' 연인들이라면 복수심에서 비롯된 죽음으로 서로와 작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용서하는 자못 감상적인 장면이 연출되겠지만, 히스클리프와 개서린이 헤어지는 장면을 보면 마치 서로를 물어뜯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임박한 죽음을 현실로 인정하고 서로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선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물어뜯어서라도 죽음에 맞서고자 하는 것이다.
데리다와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스클리프', 모두 애도가 실패해야 성공한다고 하거나, 죽어가는 사람은 애도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애도하기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애도를 한 부류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겪은 애도 중 가장 최근의 것은, 시어머니의 그것이었는데 1년이 채 못된 일이고,
내가 애도에 실패할 뻔 하여 좀 고생을 했던 건 친할머니였는데,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 되었다.
내가 좀 감성적이란 걸 아는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애도를 겪으면서 내가 애도에 실패할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음, 내가 어느 정도로 감성적이냐 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 다닌다고 했었고,-->그럼 '양철나무꾼'이 아니라 '허수아비'로 닉을 바꿔야 하나?--;
너무 울어, 일이 진척 안돼...울때마다 벌금을 내기로 했었다.
우는 걸 자제해 벌금을 줄여야 하는 데,
더 울어대서 벌금 내려면 집이라도 팔아야 할 지경이어서 '집.파.녀'란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근데, 의외로 난 쿨하게 애도에 성공하였다.
이쯤되면 혹자는 사랑의 농도를 의심할 수 있을텐데,
시어머니고, 할머니고, 내겐 최상급의 수식어로 대치될 수 있는 분들이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슬픔이 끝없이 지속될 것 같았고,
영원히 못잊고 한결같이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겪어보니, 애도에 성공하는게 쉽지는 않았지만 성공을 할 수는 있었다.
끝없이 지속될 것 같았던 슬픔도,
영원하고 한결같을 것 같았던 그리움도,
어느샌가 희미해지고 잊혀지게 마련이었다.
기억력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내게도 그렇게 되더라.
바꾸어 말하면,
끝없이 지속되는 슬픔을 간직한다는 거나,
한결같은 그리움을 간직한다는 것은,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일상적인 삶을 제대로 산다는 애기는 아니다.
데리다의 경우도 그렇고, 히스클리프의 경우도 그렇고 책속에서 걸어나오면 '미치광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애도 예찬>은 '살아있는 사람' 즉,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어찌보면 비정한 것 같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얼마동안이나 애도하면 되느냐 따위를 정리해 놓기 위해...
살아있는,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의 안위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리고 '죽은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이런 것들이 아닐까?
형식이 아닌 '마음의 지극함'을 다한 후에는 쿨하게 훌훌 떨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단정지어버리기에는 이 페이퍼의 처음에서 얘기했듯이 남자와 여자의 입장 차이가 있긴 하다.
남자와 여자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입장 차이라고 하는게 낫겠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주제를 '이별의 정한'이 아니라, '사별의 한'이라고 한 독특한 해석을 어디선가 봤었다.
그는 이미 이런 애도의 경지를 터득하였으니 이 책이 무용지물이겠다,ㅋ~.
그렇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이에서 소금이나 물을 끼얹는 것도 아니고 꽃을 뿌려준다는 거, 그거 참 이해가 안 됐었다.
애이불비(哀而不悲)가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다'로 해석되어도 그렇고, '슬프기는 하나 비참하지는 아니함'으로 해석되어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애도와 관련하여 제일 생각에 남는 건 '유령과의 사랑(원제 truly,madly, deeply)'이란 영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만든 작품인데,
애도와 관련하여(아니, 참된 사랑과 이별과 관련하여)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령과의 사랑(원제 truly,madly, deeply)>영화의 예고편(한글 자막 첨부)
'Truly, madly, deeply'
'진짜, 미치게,깊이' - 번역하면 이쯤 될까?
하지만 영화의우리말 제목은, '유령과의 사랑'이라는 줄거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좀 촌스러운 것이었다.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하는지'의 수식어를 대보라고 한다면,
저 'Truly, madly, deeply'에서 크게 비껴 갈 것도 없을 뿐더러 저 'Truly,madly, deeply'이면 부러울 것도 없지 않을까?
딱 하나 남아있는 표현이 있기는 하다, '죽도록, 죽을 만큼'
하지만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살아있어야만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다.
내가 쓰는 안 좋은 말버릇이 하나 있는데...동사나 형용사 뒤에 '죽겠어'를 붙여 극단의 상황, 최상급을 만들어 버리는 거다.
이를테면 '보고싶어 죽겠어.' 또는 '졸리워 죽겠어.'
죽은 사람을 위한 사랑을 우리는 '애도'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니,
결국 내가 만들어 쓰는 최상급은 안 좋은 극단의 최상급이니 사용하지 말아야 되겠다.



wishing you to be so near to me
finding only my loneliness
waiting for the sun to shine again
finding that it's gone to far away
to die
to sleep
may be to dream
to dream